[많이 알려지지 않은 교회사] 3·1運動(운동)때 大神學生(대신학생)들 「大韓獨立萬世(대한독립만세)」불러
閔(민) 大主敎(대주교)는 激勵(격려)
발행일1966-02-27 [제508호, 8면]
1919년에 일어났던 독립만세 사건은 실로 민족적인 거사였다.
나라를 빼앗기 서글픔을 지그시 찾아오던 겨레가 그 분노를 기어이 터뜨리고야 말았던 1919년 3월 1일. 그리스도의 대리자가 되어 이세상 것이 아닌 즉 천상영복을 얻는 일인 영혼구제를 목적으로 신학생이 되어 꾸준히 덕과 학을 연마하고 있던 이 나라의 젊은이들.
마치 기계가 돌아가는 것과 같이 정확하며 엄한 규칙생활을 해나가던 당시 용산학당의 대신학생들이었것만 피끓는 애국심은 그대로 덮어 두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그만 대신학교에 소동이 일어났다.
조용하기만 하던 대신학교에 『만세! 만세!』 소리로 학교 건물이 무너져 나갈듯 했으니, 당시 학장신부였던 진 베드루(불란서인) 신부를 비롯한 교수, 성직자들의 당황함은 쉽게 상상할 수 있게 했다.
평신도 교수였던 장면 박사의 이야기로 온겨레가 3월 1일을 기하여 만세부를 기미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용산 신학교 부근에는 거의 살림집이 없었다.
대신학생 50여명이 모두 만과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 무렵이었다.
마포구와 구용산 일대의 사람들이 외치는 만세소리가 은인히 들려왔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용산신학교 뒷산에까지 올라와서 횃불을 만들어 가지고 『만세! 만세!』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었다.
저녁 9시쯤 되었을 때 만세소리는 더욱 크게 울려퍼졌으며 피끓는 젏은 신학생들의 가슴은 애둑심에 불타 두근거리기만 했다.
바로 이때이다. 신학생 가운데 한 학생이 마침내 괴괴한 기숙사 안의 정적을 깨뜨리고 소리치고 말았다.
『우리만 가만히 있을 수 있느냐?』
『옳소! 우리도 만세를 부르자!』
이렇게 신학생들은 곧 한마음이 되어 모두 잠자리에 들기는 했었지만 눈만 꺼벅 꺼벅 거리던 신학생들이 일제히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순간 『만세! 만세!』
『대한 독립 만세!』
그야말로 기숙사 안에 소동이 벌어졌다.
흥분한 어떤 신학생들은 기숙사를 뛰쳐나갔으며 뒷산에 올라가 군중들과 합세해서 열열히 목이 쉬도록 만세를 부르기도 했다.
용산신학교 기숙사의 창문만 열면 일본인들만 사는 철도관사가 보엿는데 이런 것은 아랑곳 없다는 듯이 모든 신학생들이 있는 힘을 다해서 만세를 불렀다.
호랑이 신부로 알려졌던 진 베드루 학장신부는 이렇게 건물이 무너질듯이 소동이 나서 법석이었지만 학장신부방에서 나오지 않았으며 한국인 신부 김 아릭스 신부만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왔다 갔다 하면서 책임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이렇게 만세를 부른 대신학생 50여명은 모두 제각기 보따리를 싸기 시작했다. 이제는 모두 쫓겨날 것이라고 각오했기 때문이다.
학교의 규칙을 어겼으며 외국인 학장신부나 또는 당시의 서울교구의 주교였던 민 대주교가 용서할리 없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학장신부는 이 사실을 민 대주교에세 알렸다. 이제 대신학생들은 언제 쫓겨나느냐 하는 시기만을 초조히 기다리고 있었다. 학장신부의 보고를 받고 민 대주교는 곧 학교로 행차하게 되었다. 학생들에게 모두 성당안으로 들어가도록 명이 내렸다.
학생들은 굉장한 꾸지람을 듣고 모두 쫓겨날 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벌벌 떨기만 하였다.
그런데 민 대주교의 뜻밖에의 훈시를 학생들은 듣게 되었다.
학생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것, 그러니 아무 걱정말고 계속해서 꾸준히 공부해 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학생들은 또한번 민 대주교의 넓은 아량과 깊고 따뜻한 인간애를 느끼고 감격되어 눈물을 지었다.
다시 학생들은 보따리를 풀었다. 그리고 주님의 충실한 종이되어 오늘날 여기 저기에서 많은 열매를 거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