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般社會人(일반사회인)들의 敎會觀(교회관)을 보고
反省(반성)하고 고쳐야
발행일1965-06-13 [제474호, 4면]
■ 敎權的·形式的 / 金정수(서울 청파동본당 주임신부)
救靈方便으로 예수께서 「直接 權威·形式」을 賦與
莊嚴하고 華麗할수록 崇仰密度질어
수차에 걸쳐 「가톨릭시보」 문화 교양란에 『나는 가톨릭을 이렇게 본다』라는 주제아래 일반사회인들의 교회관(敎會觀) 및 교회에 대한 기대를 흥미거리로서만 아니라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읽어왔다.
본지의 청탁에 의해 비판이 아닌 나의 독후감을 되새겨 보고자 한다.
여러 기사를 읽으면서 많은 반성의 재료도 발견했고 또한 참된 가톨릭교회가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들도 발견했다. 이점에 대하여 한 신부의 입장으로서 반성과 아울러 그분들에게 동정이 앞섰다.
이 제한된 지면에서 가톨릭교회의 본질을 다 알아듣도록 상세히 설명하기엔 어렵겠지만 읽으면서 느낀 몇가지 점만을 들추어 설명할까한다.
오늘의 가톨릭교회는 너무도 교권적(敎權的)이며 형식적으로 홀렸다고 할수 있는가? 따라서 과거로 되돌아가 교권적이 아니요 형식적이 아닌 초대교회의 자취를 밟도록 해야 할 것인가? 하는 이점만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오늘날 특히 과거의 전례(典禮)를 따라 더욱 대중에 알맞는 전례운동이 부흥되고 있음은 기쁜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현재의 형식주의(?)에서 벗어나려고하는 몸부림치는 태도라고 생각한다면 지나치게 비좁은 견해라 할수 있다. 몇몇 인사들이 교회가 지나치게 교권적이며 형식적이라함에는 너무도 그 외관만을 주시하여 보아왔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것도 이해하여 보려는 심안(心眼) 없는 편견과 함께.
본질적인 문제는 권위와 형식이 교회를 수식(修飾)하는 부수적(附隨的)인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본질적(本質的)이냐에 달렸다. 따라서 교황 레오 13세의 말씀대로 어떻게 교권적이어야하고 얼만큼 형식이어야 되느냐에 있지 않고 창립자이신 예수께서 어떠한 권위와 형식을 갖춘 예절을 본질로 삼고 교회를 세우셨느냐 하는 점에 있다.
교회는 신령(神靈)인 천사(天使)들을 위해 세워진것이 아니요. 영혼과 육신의 종합체인 인간들을 위해 세워졌다. 주위 환경에 영향을 받는 인간들을 위해서 세워졌으되 이것은 인간들의 의사에 의해 세워진 바가 아닌 것이다. 천주성부께로부터 천상천하의 모든 권(權)을 다 받으신 예수께서 연약한 인간위에 자기의 교회를 세우셨다. 따라서 종도들은 그리스도로부터 이권을 받았고 그리스도는 성부로부터 받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보아도 즉 그들의 학식이나 지혜로 교회를 이룩한 것이 아님을 우리는 너무나도 밝히 알수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특별한 사명을 주실제 『너희의 말을 듣는 자는 곧 나의 말을 듣는 자』라고 하시며 자기만이 가지셨던 권을 제자들에게 위임(委任)하셨다. 순명(順命)을 요구하는 이 권(權)의 행사(行事)도 오만한 지배자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봉사(奉行)의 입장에서 행하라 하셨다.
사실 인간은 남에게 교육을 받게 마련되어 있고 각자소행(所行)에 매이게된 것도 천주님의 지혜로운 섭리이다.
육영계(肉靈界)의 질서는 천주님의 지혜와 사랑의 처사일진데 권리의 부여는 천주님의 지혜와 사랑에 참여할 수 있게한 그분의 심오한 사랑의 소행인 것이다. 권리부여는 위에서 말한 사랑의 표시로 볼 줄 알아야하며 그러한 견지에서 수행되어야 한다.
감각(感覺)을 통해 지식을 획득하고 정서(情緖)를 받아들이고 또 내부의 모든것을 외부로 표현해야하는 인간이기에 외관으로 나타나는 예식(禮式)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인간사회에서는 보이지 않는 사랑, 정서감정을 그 표현하는 방법이 각양각색일지라도 외적으로 표현해야 되게 마련이다.
그러기에 사도(使徒)바오로는 주께서 우리에게 그의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 한 토막의 나무위에서 죽기까지 하셨다고 외쳤고, 사랑의 종도(宗徒)라고 불리우는 요왕은 주께서 피를 흘리기까지 극도로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했다. 예수님의 그 사랑은 죽음으로 끝나지않고 예식을 갖춘 성사(聖事)를 통해 우리로 하여금 그 사랑을 느끼도록 마련하신 것이다.
이와같이 전례(典禮)의 깊은 뜻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총을 「그리스디안」 생활안에서 볼수 있고 결실을 맺도록 하는데 있는 것이다.
인간의 체질에 알맞는 예절을 통해 설정하신 성사는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의 표적(表迹)이요 보다 장엄하게, 보다 화려하게 이를 거행하는 것은 그분께 대한 우리의 사랑의 보답인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이 자기 교회의 권리와 예전에 표현되는 것이니만큼 달리 보지도 말아야하며 사랑을 떠나서도 보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나무잎은 보지만 그안에 약동하는 생명은 보지 못하는 것과 같으며 아름다움을 보되 그 아름다움을 보고 있다고 의식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아니 그것은 아무 것도 보지않는 것과 같다.
이제 한가지만 더 생각하여 보기로 하자.
예술품은 예술가의 구상에 의해 아니 그 예술가의 전체를 표현한 것이다. 그러기에 그것은 예술가가 만든것이 아니고 예술가가 낳은 딸이라고까지 한다. 이와같이 교회도 그 창립자인 예수를 본받았다. 예수께서 동시에 천주요 사람인 것과 같이 교회도 신성적(神性的)인 면과 인간적인 면이 있다. 그런데 세약(世弱)한 인간의 탓으로 때로는 인간적인 면이 신적인 면을 가리우는 수가 있다.
그것은 그 개인의 약점, 결핍 때문이며 당사자는 반성과 함께 본래의 예수님의 정신대로 고쳐서 수행해야 할 것이다. 예절에 있어서도 본질적인 것을 제외하고는 시대와 환경에 알맞도록 적용함이 또한 예수님 자신의 정신일 것이다.
『어제도 오늘도 또한 영원토록 같으신』(헤브레아 13·8) 예수님을 머리로 삼은 신비체(神秘體)인 교회도 과거나 현재나 미래에 변함없는 유기적인 활동을 계속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 傳敎않는 敎會 / 尹炳熙(서울 祭基洞본당 주임신부, 철학박사)
「손님 기다리 듯」말고 大衆속에 뛰어 들자
우리는 自家撞着속에 파묻혀 있다
가톨릭교회밖에 있는 분들이 가톨릭을 보는 일반적인 견해는 너무나 교조적(敎條的)이고 의식적(儀式的)이며 권위주의 혹은 독선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물론 가톨릭 측에서 볼때 너무 피상적이고 일방적이라고 일축할지 모르지만 여기 어느정도의 진의(眞意)가 있는만큼 자아비판과 반성이 있어야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가톨릭은 비활동적이며 현실참여에 너무나 소극적이고 자기들만의 고루한 전통과 권위에 얽매여 현실사회(속세)를 무조건 적대시하거나 죄악시하는 경향이 없지않은것도 솔직히 시인해야 될줄 안다. 모처럼 자진해서 무엇을 좀 얻으려고 가톨릭의 문에 처음으로 들어선 구도자(求道者)의 눈에 비치는 가톨릭이란 너무 냉정하고 불친절해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고 자기들 끼리만의 종교예식에 도취되어있는 듯한 인상을 주는것도 사실이다.
인간성이나 현실세계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초자연적인 신과 교리에 맹종하는 태도로 보여진다.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내려오신 첫째목적이 전인류의 구속사업이라면 가톨릭의 첫째 과업은 전인류의 영혼을 구하는 사업, 다시말하면 전교사업에 총력을 집중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가톨릭은 그리스도가 가르치신 교리를 옹호하고 자기만의 구원에 급급한 나머지 가톨릭밖에 있는 자나 타교회 신자들을 무조건 이단시(異端視)하고 배타적(排他的)인 태도로 나옴으로써 전교않는 교회라는 낙인을 찍히게 한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모든 교리나 그가 세우신 교회의 성사법규, 의식도 결국에는 인간영혼구원이 그 목적이라면 이 모든 신적(神的) 또는 인적(人的)인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해서 전교하는 것만이 가톨릭의 지상(至上) 과제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톨릭신자들의 일반적인 신상태도는 겨우 주일(主日)이나 지키고 아침 저녁기도하고 죄를 지면 고해나하고 쥐꼬리만한 교무금이나 내면 다하는 줄로 알고있는 것이다.
그들이 전교사업에 과연 얼마나한 열성과 협조를 바치고 있는지 참으로 의심스러울 정도다. 그렇다고 어느 교파와 같이 거리에서 장터에서 예수를 믿으라고 외치고 자선남비를 두들기라는 것도 아니고 가톨릭안에 여러 훌륭한 전교단체들이 전혀 활동하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것도 아니다. 다만 평신자들의 전교사업에 대한 일반적인 빈곤과 무관심을 말하는 것이다. 전교사업이란 성직자들이나 교회의 일부특정 임무를 띤 신자들만의 일이 아니라 모든 평신자들이 자기능력과 정성에 따라 협조해야 될 교회의 요구인 것이다.
이것이 평신자 사도직의 본질이기도하다. 비단 가톨릭 안에 레지오마리에, 가톨릭 노동청년회, 신용조합 등 체계적인 조직뿐만아니라 모든 평신자들이 자기집안에서 동내에서 직장에서 또는 사회에서 기도와 착한 표양과 성의있는 대화(對話)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중을 교회로 끌어들이려고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마치 장사치들이 물건을 차려놓고 손님을 끌듯이 제발로 교회를 찾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태도를 지양하고, 대중 속으로 뛰어들어가 그 가운데에다 진리를 전파하고 그리스도를 모셔다 드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에게 없는것을 남에게 줄수 없다.
평신자들은 무엇보다 먼저 자신의 신앙을 공고히하고 충분한 교리지식을 터득하고 참된 그리스도교적 봉사와 희생과 사랑의 정신으로 무장한 다음 현실주의와 물질주의에 젖어버린 대중속으로 파고들어가 불안과 절망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그들에게 영원한 삶의 확신과 희망을 불어넣어주어야 한다.
이것이 가톨릭이란 이름을 지닌 모든 평신자들에게 부과된 신성한 임무이다.
여기에 현대 「매스·콤」을 최대한으로 활용해서 진리전파에 이바지한다면 보다 더 큰 성피를 올릴 수 있을 것이다.
가톨릭이 아무리 값진 보화를 간직하고 있다고 큰소리 칠지라도 이것을 땅속에 묻어둔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촛불을 켜서 모말 밑에 두지말고 초대 위에 두어서 방안에 있는 모든 이를 비추듯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세상의 빛이 되어야한다. 승리는 정의와 진리의 편에 있지만 수고하지않고 싸우지 않는다면 승리를 기대할 수 없지 않는가! 『너희는 모든 시대와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명하신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을 우리 모든 가톨릭신자들은 실천에 옮겨야 할 것이다.
■ 閉鎖的·嚴律的 / 張勉
守護가 「閉鎖」 만은 아닐터 正當한 現世福樂은 助長
外觀만 보고 誤解한 듯
얼마전부터 본보를 통하여 교회 밖의 저명인사 여러분이 피력한 가톨릭관(觀)을 읽고 매우 참고된 점이 많았다. 그중 몇몇분의 관점은 사실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다고 보았기에 그 몇가지만 추려서 우리 입장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形式 主義
가톨릭교회의 의식은 『너무 복잡하고 무의미해 보이는 절차가 많다. 그렇게 복잡하고 기이하게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공허한 형식주의에 흐르고 있다』 운운으로 마치 가톨릭전례가 무의미한 형식주의에 빠진것인양 보고있는것 같다. 이런 관찰은 가톨릭전례의 유래와 그 표징하는 참뜻을 잘 모르는데서 나온 표현이 아닐까한다.
가톨릭전례는 말한마디나 동작하나가 다 깊은 뜻을 지니고 있으며 모두가 우리 마음을 천주께로 들어올리는것 뿐이다.
종교예식이 인간행위의 최고정점(頂点)인 만큼 거기 따르는 장엄한 예절이 있어야할 것이며 교리가 오묘하고 전통이 오랠수록 더욱 정미(精美)해질것도 당연한 사리이다.
천주께서는 구약시대에 모든 전례절차를 구체적으로 극히 세밀히 가르쳐주셨고 예수께서도 여러 의식을 몸소행하였으며 사도들도 이를 지켜와 오늘에까지 전해 내려왔다.
교회초창기에 박해를 당하여 굴속에 숨어서 예식을 행할 때는 부득이 모든 절차를 간소하게 지냈지만, 교세가 크게 확장된 오늘에 와서 더 인상적이고 장엄하게 지내야 할 것은 당연한 자연추세이다.
물론 내적숭경의 정성이 없이 외식에만 그친다면 이것이야말로 허례일 뿐이지만 이는 결코 교회의 뜻이아니고 따라서 전례자체가 허식적인 것일 수 없는 일이다. 전례는 오히려 신앙의 열렬한 불꽃을 더욱 치열하게 일으켜주는 것이다.
국외인사로서 그 내포된 참뜻을 모르고 겉으로만 본다면 부질없이 「복잡하고 무의미하고 기이하게」만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이러한 평을 내리기전에 한번 그 유래와 상징하는 「심볼」의 뜻을 먼저 알아보기를 권하고 싶다.
▸現實과 人間否定
또 여러분은 가톨릭교가 지나치게 『현실과 인간을 부정하는것 같다고 보고 본능을 학대함은 자기파탄과 위선으로 흐르게하며 자학 (自虐)만이 절대자를 향하는 유일의 길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말 이 혹 가톨릭의 극기(克己)의 교훈과 수도생활의 근본정신을 깊이 들여다보지 못한데서 나온 말이나 아닐까?
가톨릭에서는 현실도 인간도 부정한적이 없으며 자학만이 절대자를 향하는 유일의 길이라고 가르치는 일도 없다. 다만 그리스도께서 인생의 최종목표는 현세에 있지않고 내세에 있다고 분명히 가르치셨고 내세의 행복을 위해서는 현세향락과 이득에만 몰두하지 말고 이를 정신적으로 초월하여 모든 추잡한 쾌락과 불의의 욕심을 버리고 십자가의 가시밭길을 걸을지언정 오직 십계명의 테두리안에서 옳은길을 걸어가라는 교훈을 우리는 그대로 준수하기로 힘쓸 따름이다.
『누 만일 나를 따르고저 하거든 자기를 끊고 제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마·16·25)하신 예수의 바로 그 말씀을 실천하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세를 위해서 현세의 모든 현실을 무시하거나 부정하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부정한 향락과 불의의 행위를 금할 뿐이다.(완덕을 닦기 위한 극기와 금욕생활은 더 높은 차원에서 이를 권장한다.)
교회는 오히려 내세의 준비과정으로서의 현세에서 정의에 입각한 인권존중과 협조정신으로 건전한 공동복지를 달성하도록 전폭적으로 사회현실에 참여하여 꾸준히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역대교황들의 사회정책에 관한 회칙(回勅)들이 바로 가톨릭의 현세복지를 위한 기본노선을 보여준 것이다. 이 거창한 목표달성을 지향하여 무수한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가 각종 자선사업 개발사업 교육문화사업 등에 헌신봉사하고 있는 성스러운 모습을 바로 보아주기 바란다.
▸閉鎖的이고 獨善的
외부인사들 중에는 가톨릭교회가 아주 완고하고 독선적이라고 보는이가 많은 모양이다. 이런 관찰은 그분들 나름으로 이유도 있겠지만 이는 필연코 16세기 종교개혁의 여파로 조성된 자유주의의 선입견에서 나온것이 아닐까? 진리는 하나이다. 더우기 진리자체이신 천주께서 직접 가르치신 신앙의 진리는 오직하나뿐이다. 바오로 사도는 이점을 특히 강조하여 『한 주시요한 신앙이며 한성세가 있을 뿐이라』(에베소 4·3-6)말씀하였다. 이런 일치의 원칙이 엄연히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 개혁」이래 수백종의 교파가 분열되어 수습할 수 없는 혼란에 빠졌을때 아무 분별도 없이 갑도 옳고, 을도 옳고 다 옳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유일한 신앙의 진리를 수호하는 올바른 태도일까? 수호(守護) 「폐쇄」로 보고 「독선」으로 본다면 이것은 너무 지나친 표현인 것 같다. 가톨릭교회는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교파가 종래의 편견과 장벽을 제거하고 형제의 사랑으로 재일치하자는 운동을 전개하여 꾸준히 이를 추진해 왔다.
교황 요안 23세는 이 교회일치운동을 철저히 실현시키며 「바티깐」 공의회를 소집하고 전세계 주교들과 동방 「오토독스」 프로테스탄 지도자들까지를 초청하여 공개적으로 이문제를 진지하게 토의하였고 이에 관한 율령까지 내려 전세계 종교인의 누적된 염원을 성취시키려 노력하고 있다.
현 교황 바오로 6세는 그리스도신봉자 뿐아니라 비그리스도교관계와 무신론관계 사무국까지를 교황청 내에 설치하고 흉금을 터놓은 대화와 이해를 통하여 다같이 천주를 믿고 섬기도록 온갖 정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신앙은 강요할 수 없는 일인 만큼 어디까지나 각 개인의 양심에 맡겨 자유선택의 권리를 존중하고 기존종교의 장점과 각국민족문화의 좋은 전통을 살려 신앙진리와 적절히 조화되도록 폭넓은 이해로 조물주께 대한 공동숭경(崇敬)의 거창한 과업을 힘차게 추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