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會(회) 總長(총장) 從前(종전)과 같이 終身制(종신제)로
「루르드」에서 天主(천주)를 세 번 만났다고, 西班牙(서반아) 出身(출신)
原子時代(원자시대)에 精神的(정신적) 原子力(원자력)의 武裝(무장)을 強調(강조)
【로마 NC】 예수회총회의 대표들의 70「퍼센트」 이상은 동회 총장의 임기를 종전과 같이 종신직으로 할것에 찬표를 던졌다. 이것은 배드로·아루페 신부가 동회 총장으로 선출된 후 있은 표결에서 결정되었다.
신방할만한 소식통에 의하면 금번 제31차 예수회총회는 수개월간에 걸릴 본래의 계획과는 달리 6월중에 끝날것이라하며 그간의 회의 진행과 여러가지 문제에 대한 표결결과는 「바티깐」 공의회의 정신에 호응하여 동회의 현대화를 참석 대표들의 대부분이 지지하고 있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게 하였다고 했다.
그중 한대표는 특히 새총장의 정신은 요안 교황의 그것과 아주 흡사하다고 말하면서 그의 피선(被選)은 동회의 현대화에 박차를 가하는 것일 거라고 하였다.
■ 新任예수會 總長 「프로필」
▶아루페 神父
예수회의 신임총장 베드로·아루페 신부는 예수회원이 되기전부터 이미 천주와 이웃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생활을 하였다.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의 의과대학생이었을때 그는 성 원선시오 자선사업회에 평신도로 가입하여 연학의 여가에는 병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아주곤 했다.
양친은 그의 대학재학중 별세했다. 그후 얼마안되어 「루르드」의 성모성지를 순례하였는데 그곳에서 그는 연이어 세가지 기적을 목격할 수 있었다.
아루페 신부는 최근 이때를 상기하면서 『내가 목격하게된 그 세가지 기적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당시 스페인은 공산당이 정권을 잡고있었고 대학분위기는 완전히 무종교적이었으며 교수들은 과학의 이름으로 일체의 초자연적인것을 신랄히 비판하고 거부하였다. 그런 가운데서 공부한 나역시 신앙의 동요를 느끼지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루르드」에서 천주님을 세번이나 만났다』고 말하였다.
1927년 2월 아루페는 「로욜라」에 있는 예수회수도원에 들어갔다. 그의 누나들은 『동생이 「로욜라」로 갈때에는 잠시 피정하려는 줄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돌아오지 않는 길이었다』고 회고 하였다.
그러나 이 편도(片道) 길은 그를 신학공부를 위해 「벨기」로, 사제승품 후에는 다시 연학계속을 위해 미국으로 인도했으며 그후 일본의 「히로시마」 「도꾜」 드디어는 지난 5월에는 그를 「로마」로 이끌어 예수회총장에 당선케 하였다.
아루페 신부는 당년 57세이고 1907년 11월 14일 스페인 「바스크」 지방 「빌바오」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신문인이었으며 오늘날에도 스페인에 있어 중요한 가톨릭신문인 「라·가체타·델·놀테」의 창설자 이다.
스페인의 많은 사람들은 아루페 신부의 인상이 예수회 창립자인 성 이냐시오와 아주 흡사하다고 한다.
넓은 이마와 백발에 언제나 미소짓는 그 모습이 특히 그렇다한다. 그의 총장당선설은 스페인에서는 많이 퍼져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누이중 하나는 그가 총장이 되지않도록 매일 같이 기구하였다 한다. 『하지만 천주의 성의는 끝내 이루어졌다』고 그의 누이 이사벨라 여사는 말하였다.
1938년 9월 아루페 신부는 그가 오랫동안 소망하였던 일본으로 가게 되었다. 쉽게 일본말을 배운 후 「히로시마」에 있는 예수회수련장으로 임명받았다. 그는 이곳에서 원자전의 무서움을 직접 목격하였는데 1945년 8월 5일 그의 수련원에서 7「킬로」 떨어진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때의 체험담을 두권의 책으로 발표했다. 여기서 그는 『인류세계의 장래는 연약한 인간의 손이 원자력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느냐에 달려있다. 그런데 우리에게 결핍된 것은 정신적 원자력이다』고 말하였다. 1954년 아루페 신부는 예수회 일본관구 부관구장이되었고 4년 후에는 관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오늘날의 일본의 큰 문제는 불신(不信)과 회의주의, 마음의 공허와 절망이다』라고 개탄하였다. 이제 공의회를 통하여 전체교회가 쇄신을 지향하고 있는 시기에 『검은 수단의 교황』이라고까지 불리는 예수회 총장에 당선된 그에게 대한 기대는 크다. 【NC 本社綜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