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톡홀름·瑞典 NC】 5월 중순 어느날 「웁살라」대학 강당에는 수백명의 청중이 한 젊은 신학도가 자신의 학위논문을 변호하는 것을 듣기위해 모여들었다. 이젊은 신학도의 이름은 알프·할델린이라고하고 그의 논문이 특별한 관심을 집중시킨 이유는 스웨덴 국교인 루터교 목사였던 그가 5년전 가톨릭교회로 개종하였기 때문이다.
할델린의 논문이 관심의 대상이된 또 하나의 이유는 그것이 1세기전 영국에서 그와 흡사한 처지에 놓여있었던 존·헨리·뉴만 또는 에드와드·퓨시같은 신학자들이 쓴 성체성사에 관한 논설들을 취급하고 있다는데서였다.
과연 영국의 「옥스포드」 운동과 오늘날 스웨덴에 있어서의 고교회(高敎會) 운동사이에는 여러가지 비슷한 점이 있다.
두 운동에 있어 다같이 무시할 수 없는 신학자들이 그들이 속했던 국교(國敎)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는 것이고 동시에 그것이 많은 왈가왈부의 사회적물의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또한 양자가 다같이 대학안에서 일어난 점도 흡사하다.
할델린은 「웁살라」대학 도서관원이며 동 대학에서 신학박사학위논문을 제출한 두번째의 가톨릭이다. 그보다 앞서서는 1962년에 역시 목사로 있다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펠·베스코브가 초대교회에 있어서의 그리스도왕(王)에 대한 신학논문을 제출한 바 있다.
베스코브는 학위를 받은 후 「웁살라」대학 신학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웁살라」는 스웨덴에 있어 국교인 루터교교역자 양성중심지의 하나인데서 대학당국은 가톨릭을 신학부교수로 임명하기를 매우 꺼렸으며 그 나머지 정규과목으로는 없는, 교부신학(敎父神學) 교수로 그를 임명함으로써 물의(物議)를 피하였다. 베스코브는 그 때문에 생계(生計)를 위해 「스톡홀름」인근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종교와 철학강의를 하지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제 비슷한 「케이스」에 놓여있는 할델린이 「웁살라」대학 신학부 정교수로 임명될지 여부에 대한 관측이 구구하다.
1962년 이래 약10명의 스웨덴 「루터」교 목사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해왔다. 이들은 대개가 다 가족을 가졌고 또 가톨릭으로 개종하면 목사직을 떠나야하고 따라서 그들의 생계가 큰 위험에 봉착되는 줄 알면서도 개종을 단행한 사람들이다. 지금 그들의 대부분은 고등학교선생으로 있다.
이들은 거개가 여러해동안 스웨덴 프로테스탄교회안에 일어나고 있는 고교회(高敎會)운동에 관여하였다. 이 운동은 주로 영국 성공회와 「로마」로부터 그 「인스피레이숀」을 받아 일어났다.
고교회운동은 1958년경에 루터교회 내의 새로운 동향에 크게 실망하였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동 교회가 여론과 정부의견을 따라 여(女) 목사제를 제정함으로 써다.
그 이후 11명의 여성이 목사직을 받았으며 스웨덴 루터교의 종교적 일치는 흔들리게 되었다. 그러자 요안 23세 교황이 「바티깐」 공의회 소집을 표했을때 많은 고교회운동에 속하는 목사들은 가톨릭교회야말로 자신들이 소망하고 있는 것을 이루어가는 교회라고 보게 되었다.
오늘날 스웨덴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사람들은 목사들만이 아니다. 그들의 신자, 학생, 교사 기타 지성인들 사이에 개종의 수는 파상적으로 늘어가고 있다.
그중에는 저명인사도 있으며 「스톡홀름」 왕실음악학교 교수이며 작곡가인 랄스에드룬드도 그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