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알려지지 않은 교회사] 「대궐보다 높다」 말썽
당시 땅값 은화로 백원 토지 매매에 7년 걸려
반대하던 대신들 축성식서…「놀랍다」고
대들보 없는 새 건축법 몰라 시민들 조소
청일전쟁으로 공사 한때 중단
발행일1965-06-20 [제475호, 3면]
■ 명동대성당
명동성당이 1898년 5월 29일, 역사적인 축성식을 가지기까지는 많은 「에피소드」를 낳았다. 명동성당은 당시 종현(鍾峴)성당으로 불리워졌다. 1892년 9월 25일 정부로부터 땅을 사들였는데 땅값은 당시의 은화(銀貨) 백원이었다. 허지만 대지매매 문서가 정식으로 문서상의 확립을 보게 된것은 1899년 1월 10일이었다. 지금도 그당시의 대지매매문서를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는 보관하고 있다고 이(李丙泳)씨는 말하고 있다.
그 문서에는 정부대표자 남(南궁억)씨의 「사인」도 있으며 대지의 도면이 그려져 있다. 곧 성당의 건축공사는 시작되었으며 불란서인 꼬스트 신부의 설계 감독에 의하게 되었다. 허지만 도중에 1894년의 청일전쟁으로 말미암아 공사는 일단 중지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렇게 수난에 수난을 거듭하면서 다시 공사는 계속되어 갔는데 당시 국내에서는 말썽이 많았으며 적극 반대하는 대신(大臣)도 있었으니 그 이유는 대궐 보다 높은 집은 절대 지을 수 없다는 것, 대문이 남쪽으로 향해서는 안된다는 것, 그런데 명동성당은 대궐보다 높을뿐 아니라 또 거기에 서양 사람이 짓는다는 사실 등으로 대단한 말썽거리로 등장하는 것이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의 비웃음도 받았으니, 그것은 대들보와 석가래를 긋지 못하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기만 하니 저것이 제대로 집이되겠느냐 하는 비웃음 이었다. 허지만 모든 난관을 돌파하고 드디어 명동성당은 1898년 5월 29일(음력 4월 10일)에 성대한 축성식을 보게 되었다. 초청된 사람들은
內部大臣-朴定限
外部大臣-趙秉穆
法部大臣-李裕寅
度支大臣-沈相薰
學部大臣-趙秉鎬
農商工部-李道辛
軍部大臣-閔泳綺
宮內署理-尹定求
등을 비롯한 고종치하의 고관대리를 모두 초청하였다. 여기에서 특기할만한 사실은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하던 대신도 이날 참석하여 그 웅장하고 신비로운 성당앞에 맘껏 축하를 올렸다는 사실이다. 초청장의 원문도 보관되어 있어서 볼수 있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랫동안 지어오던 종현성당의 건축이 끝나 음력 4월 10일 본당에서 축성하고 12시에 간단한 「파티」를 갖고 하오니 부디 참석해 주 바란다』는 내용을 민주교 이름으로 발부되었다.
그리고 축성예절을 행한 것을 보면 오전 6시반에 성당축성대례가 있었고 10시에 축종례(祝鍾禮)가 있고 10시반에는 대미사가 거행되었음을 알게 한다. 축종례가 있을때에는 사람들의 가슴을 또한번 뜨겁게해 주었다. 그것은 성당건물이 다 되어가자 민대주교는 종이 없음을 매우 걱정했다.
다른 신부들은 불란서에 종을 주문해 놓고도 잠잖고 있었다.
종이 명동성당에 도착하자 민주교는 기쁘고 놀란 나머지 어찌할바를 몰라하면서 『왜 나에게는 종 이야기를 안했느냐?』 하더라는 것이 아닌가? 『주교님에게 기쁜 선물로 바치고 싶어서 그랬읍니다』
이렇게 해서 민주교에게 있어서 큰 근심거리였던 종. 그것이 축종례를 받게되었을 때 민대주교는 엄숙히 다음과 같이 축문을 외웠다.
『우리는 앞서간 순교자들이 피를 흘리며 지켜온 영광의 땅 이곳에 성당을 세우니 저 멀리 지평선을 굽어보는 이 대성당의 성탑은 우리의 영원한 안내자가 되리라』
이렇게 명동성당의 준공식은 당시 교우 미신자를 불문하고 큰 화제의 중심이 되었으니 앞으로도 계속 명동성당은 우리들 조상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 방향으로 방황하는 영혼의 길잡이가 되리라고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