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C에서】 「마닐라」 교외 형무소에 억류중에 있는 두사람의 전(前) 필립핀 공산당 지도자들은 당을 떠났으며 그것은 공산당 안에서 격심한 환멸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그중 한사람은 루이즈·타룩이고 당년 52세의 그는 여러해동안 필립핀 공산당군부(軍部) 즉 「훅」의 총수(總帥)였다. 다른 하나는 알프레도사울로이고 당년 51세인 그는 1946년에 공산당에 가입했고 후년에는 「훅」 운동의 선전부장이었다한다(「훅」-HUK-은 반일(反日) 전쟁시에 조직된 「훅발라함」 -인민군 후에는 「훅클롱·마팍팔 곽라양, 바양」 인민해방군이라고 불리운것의 약칭(略稱)이다.)
지금은 반백(半白)의 머리에다 달소리가 부드러운 이 두 사람은 정부군에 의해 붙잡혀서가 아니고 스스로 하산(下山)하여 투항함으로 이 자리에 오게 되었다. 그들의 투항이유는 공산당 지도자들에 대한 환멸이다. 루이즈·타룩은 1954년 5월에 자수(白首)했고 알프레도·사울로는 1958년 11월 「마닐라」 주재 인도네시아대사관에 정치망명을 구했다가 옛세후에 역시 정부측에 귀순했다.
타룩은 「팜판가」주(州) 「산·루이주」에서 태어났고 가정은 가톨릭이었다. 그러나 가톨릭학교에 다닌적은 없다. 「마닐라」 북방에서 중·고등학교를 거친 후 국립대학교에 들어갔으며 1932년~1934년 2년간 이 대학 법대의 예파생으로 있었다.
그후 사회당에 가입하여 동당 서기장이 되었다. 1938년 사회당과 공산당은 합당(合黨) 했다. 그는 이때를 상기하여 『당시의 반(反) 「파시즘」 및 반일(反日) 투쟁의 긴급한 사태하에서는 공산당과 합치는 길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한번도 공산당의 정규당원은 되지 않았고 「스탈린주의」 자들과는 언제나 사이가 틀어져있었다. 나는 공산주의의 정신적 바탕인 무신론을 수긍한적은 한번도 없었다』고 말하였다.
알프레도·사울로는 「뉴에바·에시쟈」주(州)의 「알리야가」 근처 시골에서 태어났다. 『우리 부락(部落)에는 신부는 없었다.
그러나 나는 영세를 받았고 가톨릭이로 자라났고 가톨릭으로 죽는 날까지 사는 것이라고 당연히 생각하고 있었다』고 그는 말하였다. 사울로를 필자가 처음만난 것은 1950년 2월 「마닐라」에서다. 그당시 그는 노동조합(CLO)의 서기였는데 이 노동조합은 다분히 공산당의 지배하에 있다는 의혹을 갖게 했다.
그 사무실을 방문함으로 필자의 이같은 의혹은 더 짙어졌다.
사울로역시 국립대학교에 들어갔고 의과대학 예과생으로 있었는데 후에 「산토·토마스」 가톨릭대학으로 전교(傳敎) 했다.
2년후 즉 1935년 문학사로서 대학을 졸업한 그는 신문계에 들어가 2차대전시 「게릴라」지(紙)를 발간했다.
그는 당시를 회고하여 『나는 주로 노동자의 권익옹호에 대하여 썼다. 그래서 공산당의 관심을 많이 사게됐으며 그들 지도자들 중 몇은 내가 결석해있었는데도 나를 노동조합 부위원장으로 선출하기까지 했다. 그들이 추어올리는 바람에 나도 이를 수락했고 그들이 내게 당원자리를 제공했을 때에는 나는 「스타·레포터」 지(紙)의 편집장이었었다』고 말하였다.
이어 그는 『그들의 정강(政綱)과 정책을 읽고서 내가 지닌 이상주의 때문에도 지성인으로서 당의 사회혁신창도(唱導)에 나는 매혹되었었다. 그들은 나를 줄곧 칭찬하면서 당에 가입하도록 권유하였다. 내가 가톨릭이라고 말했어도 그들은 그것은 조금도 관계없다고 하였다』고 술회했다.
당원으로 있은 것이 약 5개년 된다고 그는 밝혔다.
1950년 9월- 필자가 그를 만난지 7개월 후에- 그는 간신히 체포망을 벗어나 산에 있는 「훅」사령부로 도피하였다.
그럼 왜 공산당과 여러해 동안 밀접히 일해왔던 이두사람이 오늘날 이와 결별하게 되었는가?
여기대하여 타룩은 『나를 몸서리치게 한 것은 공산당원들이 그들자신의 동지들에 대한 비인간적 태도였다.
정부군과 아군(我軍) 사이에 서로 보복 수단을 쓰는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내란(內亂)에서는 상방이 다 폭행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사소한 혐의만으로써 자신들의 동지들을 사정없이 숙청해버린다. 10년후 오늘에 와서 숙청된 사람중에는 무고한 사람들이 많았음을 알게되었다』고 말하였다. 그는 한 예로써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1950년 당시 최고지도자들은 당의 규율을 엄격히하고 다른 당원들에게 두려움을 주기위해 재판도 없이 전(前) 서기장인 메드로·카스트로와 3명의 중앙위원을 포함한 그의 추종자들에게 사형언도를 내렸다. 그들은 「마닐라」에서 노동조합에 적극적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들은 조기(早期) 내란에 반대했을 뿐이었다.(1950년 1월이 정부 전복 감행시기였다) 타룩은 「마닐라」의 「훅」 책임자에게 암살 지령을 실시하지 말도록 설복하여 그들의 생명을 구했다.
당지도자들의 협의 대상이된 다른 사람들은 불행히도 희생 되었다. 타룩은 그가 자수한 후에 집필한 아직 출판되지않은 회고록에서 무자비한 사형집행의 「케이즈」들을 들고 있다.
가령 젊은 간호부인 리타는 휴가로 집에 돌아가기를 청했는데 자수하기 위해서라는 혐의아래 숙청되었다. 또 16세난 소녀급사는 정부군에 붙잡혀 신문받았을때 그가 하산(下山) 했을때 머문 통해 동네집을 대주었다. 그러나 이것의 발설때문에 아무에게도 해를 끼친 것은 없었는데 소녀는 재판도 없이 「훅」에 의해 총살됐다. 그녀와 함께 병고(病故)로써 사령부를 떠난, 그러나 그의 보좌관을 시켜 자기자리를 지키게 한 「훅」 보안대의 소대장하나가 처형되었다. 타루은 『이같이 6·7명의 젊은 당원들이 별일아닌것으로 사형되었다』고 말하였다.
그는 이어 『공산주의자들은 당원모집을 할때는 천하에 둘도 없는 가장 민주주의적인 동지(同志)애를 약속한다.
그러나 누구든지 일단 그속에 들어가기만하면 목숨을 걸지 않고서는 빠져나올 수가 없게 돼있다』고 말하였다.
『당의 정책에 조그마한 이의(異議)만 붙어도 그는 그만이지요』라고 사울로가 말을 덧붙였다. 그래서 필자는 그의 탈당이유는 무엇인지를 물어보았다. 그는 질문에 답하여 『내 마음속으로는 이미 1951년에 당을 떠나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나를 죽일것만 같아 아무런 이의도 발표하지 못했다』고 말하면서 도피의 기회를 얻기 위해 7년 을 기다려야만 했다고 하였다.
이어 그는 『내가 당에 가입했을때는 나는 변증법적 「맑시즘」도 소련의 역사에 대해서도 몰랐었다. 당지도자들은 아주 교활해서 종교 문제를 제기치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입당후에 그들은 종교를 부정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내가 당을 떠난것은 그들의 악랄한 정책과 무신론적 태도 때문이었다』고 말하였다. 두사람은 다같이 이제는 독실한 가톨릭이다.
으코너 神父 記(NC 特派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