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제)18回(회) 佛蘭西(불란서) 가톨릭 知性人(지성인) 週間(주간)을 보고
道德(도덕)과 基督敎(기독교) 倫理(윤리)
「모랄」 忌避(기피)하는 現代人(현대인)들
無神論者(무신론자)까지 參席(참석)하여 진지하게 論議(논의)
强制(강제)보다 自發的(자발적)인 道德化(도덕화)의 길
不義(불의)한 信者(신자)와 義(의)로운 未信者(미신자) 등
「불란서 가톨릭 知性人週間」이 예년과 같이 「빠리」에서 개최되었다. 올해도 처음 나흘간은 작년부터 채택된 信者 아닌 演士(無神論者 및 막시스트)가 초대되었다. 비록 信者가 아닐지라도 우리들의 형제임에 틀림없는 많은 사람들의 생각하는 바를 이들 대표자를 통해 듣고 또한 對話함으로써 보다 충실한 人間으로서, 그리스도의 子女로서의 길을 摸索하려 했던 것이다. 이 대화는 이미 새로운 것이 될 수 없으나 작년보다 한결 새로운 것이 있다면 對立되는 思想을 가진 雙方의 演士들이 誠實性을 가지고 피차 理解하려 노력하였고 또한 서로의 共通点을 찾으려 애썼던 点이다.
그들은 적어도 지금 여기, 이세상에서의 같은 조건 밑에 살고 있는 같은 兄弟임을 서로 잊지 않으려 했다.
처음 나흘동안 다루어진 문제는 「모랄의 危機」, 「生理學과 精神分析學 앞에선 모랄」, 「歷史와 社會와 모랄」, 「形而上學과 宗敎와 모랄」이엇고, 나머지 사흘동안은 「現代 心理와 宗敎敎育」, 「기독교 모랄은 바뀌느냐」, 「기독교人의 自由」란 문제가 信者들만이, 신자들만의 問題로 취급되었다.
세상의 급격한 발달과 學問의 진보는 人間의 自由보다 自由의 條件에 대해 더 관심을 갖게했고 人間의 責任意識을 生理學的, 精神科學的, 社會學的 與件에 맡기려는 현저한 경향은 「모랄」이란 말 자체를 싫어하게 만들었다고 나아가 「모랄」은 存續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信者는 물론, 未信者도 이에 등한할 수 없게 된 것은 오늘날까지의 社會規範, 道德, 倫理는 이제 그 在來의 意味를 더이상 지닐 수 없게 되었으며 그 意義에 대해 다시 질문하지 않을 수 없게 된 때문이다.
道德이 결여된 社會를 인정하려들지 않는 것은 참가한 모든 演士들의 共通된 의견이었는데, 한편 이들은 만약 現代社會가 지닌 倫理가 意味를 상실하고 있다면 그것은 現代社會의 現代人에게 맞는 倫理가 그들에 의해 발견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 했다. 또한 만약 윤리적 「파리사이즘」이 굳어진 외각만 남은 倫理이며, 法條文的인 外部制裁만이 「모랄」의 존재를 인식케한다면 전연 良心에 호응하지 않는 外部行動의 規範은 더 존속하려는 고집을 버리고 人間의 自由와 責任意識을 존중하는 良心의 道德化가 시급하다고 했다.
永遠한 人間的倫理, 「不義한 信者와 義로운 未信者」의 문제는 이번에도 다시 우리에게 反省을 促求했다. 信者 아닌 사람중에도 신자 이상으로 人間의 正義와 人類愛를 발휘하는 이가 있음을 볼 때 信者는 다만 영세한 행복만을 기억하고 그들이 信者 아님에 대해선 吾不關焉일 것인가.
人間이 本質的으로 宗敎없이도 義로울 수 있을진대 어찌 信者만이 반드시 「스캔달」이 될 수 있을 것이며, 義로우라는 것이 神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信者의 不義가 「스캔달」이라면 未信者인 義人은 自己의 우수성만 고집하고 神을 끝내 외면하고 부정하려고만 들 수 없지 않는가.
금요일 고기를 먹지 말아야 하는 것에 순명하는 敎人은 法에 저촉 안되는 더 값진 물고기를 먹을 수 있는 것이 기독교의 倫理냐?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고 나그네를 머물게 하고 헐벗은 자에게 입을 것을 주고…(마두복음 25.31-46)라는 것은 다만 人間道德일뿐이냐. 人間道德과 基督敎倫理는 두가지 이질적인 것으로 유리되어 있을 수 없다.
기독교倫理는 가장 완전한 人間道德을 부르는 것이다. 완전한 人間道德은 완전한 人間像을 가지고 있고 완전한 人間像은 그리스도에게서만 볼 수 있다.
물론 그리스도를 通해서 찾는 人間像을 未信者들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특히 이번 연사들 중 「맑시스트」와 無神論的 實存主義哲學者들은 완전한 人間像은 人間 스스로가 만들어야 하는 永遠한 숙제라고 말하였다. 倫理를 人間行爲의 질서를 規制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지닌바 人間像에 따라 그 倫理觀도 달라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렇듯이 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對話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도 역시 지금, 여기 이 세상에서 自己良心의 命令대로 義롭게 살려는 根本的인 一致를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며 이것은 이미 작년 「오늘날의 神」을 이야기할 때부터 분명히 그러나는 共通点이었기 때문인 것이다.
신자, 미신자를 막론하고 모두가 다 오늘날의 倫理問題가 급박한 문제임을 의식하고 있고, 더구나 신자들에 있어서는 더욱 절실히 느껴지는 문제임에 人間道德과 기독교 倫理란 題目이 채택되었으며, 특별히 對話의 共通点을 찾는데 면밀한 주의를 기울였다는 점이 題目을 채택한 이번 「가톨릭 지성인 週間」의 特記할 일이라 하겠다.
李文熙 神父(불란서에서, 大邱大敎區 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