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알려지지 않은 교회사] 「미사」감시 하던 "북괴”
「6·25는 해마다 슬픈 추억을 되살린다…」
발행일1965-06-27 [제476호, 3면]
오늘에 살고 있는 우리는 먼 옛날의 박해시대를 생각하지 않더라도 눈앞에 있는 공산당들의 교회 박해가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 곧 알게해 준다. 해마다 6·25를 맞으면 슬펐던 추억이 되살아나서 더우기 슬픈 지금의 내 심경을 몹시 부채질 해준다.
나는 평양에 있다가 황해도로 옮겼었다. 6·25사변이 나기전 공산당들의 교회박해는 노골화하기 시작했다. 죄없는 어린이가 주일에 성당에 나가면 다른 많은 어린이가 막대기를 들고 그 어린이를 따라서 성당에 몰려온다. 미사때에는 내무서원이 미사 끝날때까지 감시를 하기도 한다. 허지만 이렇게 감시를 받으면서도 미사를 드릴때에는 그래도 좋았던 시절이다. 평양의 신부들을 모조리 잡아가기 시작했다. 교회의 문이 완전히 닫히고 말았다. 교회들은 모두 흩어지게 되었다.
나는 황해도 수완에 있다가 성불사로 갔었다. 아침이면 몰래 미사를 드리고 언제 정치보위부에서 와서 나를 압송해갈 것인가 기다리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이다. 새벽인데 밖에서 내무서원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밥짓는 70노인이 있었는데 밖에서 『이집 주인 나와!」하는 소리가 들렸다. 할머니는 겁에 질려서 벌벌 떨고 있는 듯했다.
『무슨 일들이요. 이 새벽에!』
『이집 주인 어디갔어?』
『이집 주인은 나요!』
『어떤 놈이 이집에 숨어있지?』
『숨기는 누가 숨소?』
하두 늙은 할머니이니 별일 없으리라고 생각했던지 그들은 그냥 가버린다. 그러나 나는 그때 감금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기 생활을 일일히 정치보위부장에게 알리게 되어 있었다.
하루는 정치보위부장이 나타났다.
『동무! 이남방송 들었지?』
『아니! 나 안 들었어…』
『좋아! 이남방송 들어도 좋아! 그보다 더 지독한 신부 인데…』
『나 오늘 밤 신부하고 여기에서 잘테야』
『그래! 함께 자도록 하지!』
그러나 권총을 차고 있는 정치보위부장은 독방을 달라고 했다. 아침에는 나를 잡아 압송하려는가 보다 생각했는데 아침에 정치보위부장은 안심하고 있으라!고 한마디 말하고 가버렸다. 이말을 들은 교우들은 신부님을 안심시켜놓고 갑자기 잡으러 올려고하는 짓이니 속히 피하도록 하라고 전했다. 나도 앉아서 잡히기보다 한번 피해보다가 잡히는 한이 있더라도 피할 생각이 났다. 나는 평양으로 들어갔다. 그동안 일곱군데의 심문을 받았으나 용히 빠져나갔다. 평양에는 한사람의 신부도 없었다. 평양에 있던 교우들은 나를 보고 모두 야단이었다. 『호랑이 굴에 들어오시다니! 모두 평양 밖으로 피하는데 어쩔려고 평양으로 오느냐?』고 걱정들이었다. 지금도 그때 걱정해주던 교우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질것 같다. 자기들이야 어찌되던 신부를 구해야하겠다는 그 일념이 오늘날까지 나를 살도록 주께서 안배하셨다고 생각한다.
교우들을 위해서 교우의 종인 신부를 주님은 살려주신다. 나는 몇번이나 죽을 위험을 당했으나 죽지 않았다. 내가 지금 교우들의 참된 종으로 최선을 다해서 일하지 못하는것이 슬플 뿐이다. 허지만 내 영혼의 구속사정을 위해서 주께서는 더 좋은 것을 안배하셨으리라 생각할때 주의 뜻이 어디에 있겠는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모든것을 주께 맡기고 이곳에서 조용히 살아가고 있다.
지금은 미사를 남들의 눈을 피해가면서 몰래 드리지 않아도 된다는 이 기쁨 하나만이라도 큰 보람 이 아닐 수 없겠다. 공산치하에서 신음하는 교우들을 언제까지라도 주여 버려두지 마옵소서. 그들의 유일한 소원, 당신을 영할 수 있는 기쁨이 죽기전 있을 수 있게 해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