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라파 겉 핥기錄(록) (21) 「쥬리히」의 밤
근대와 중세기가 혼합한 「쥬리히」거리
인심도 좋고 조용하기만 하고
발행일1966-04-03 [제513호, 3면]
나는 독일에서 오지리로 떠날차비를 하고 있었다. 여권수속을 끝내긴 했지만 막상 떠나려니 수술을 받은 팔이 아직 아물지를 않아 가방을 들 수가 없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팔이 나을때까지 「뮨헨」에서 세월을 보낼 형편도 못되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염치좋은 방법을 생각해냈다. 나를 보살펴줄 동행인을 구하는 일이었다. 그 대상으로 등장한 분이 지금 수원교구에 계시는 유봉구 신부님이다. 그러니까 유신부님은 큰 골치덩어리를 만난 셈이 되었다.
그렇지만 마음 좋기로 이름난 유 신부님이 이국만리 외국땅에서 나의 이 간곡한 청을 마다할리가 없었다.
동반자가 되준 것만 해도 고마운데 내가 가기로한 오지리로 가자고 조를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신부님은 어디로 가실 예정이었읍니까?』
나는 조심스럽게 신부님의 눈치를 살폈다.
『나? 난 스위스로 갈 예정인데』
난 두말없이 신부님이 가는 「코스」를 밟겠다고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그때 나혼자는 양복도 입을 수 없을 정도의 불구자 노릇을 하고 있었고 왼쪽팔은 붕대로 감아 어깨에 짊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뮨헨」 비행장에서 유 신부님은
『이제부터 꼼짝 못하고 태민씨 복사 노릇을 하게됐는데…』하면서 쓴 웃음을 웃고 계셨다.
내가 신부님을 모시고 가는게 아니고 신부님이 내 무거운 손가방까지 들고 시중드는 고역을 맡으시셨으니 내가 생각해봐도 무척 어처구니 없는 고생을 신부님께 끼친 것이다.
스위스 「쥬리히」의 밤거리를 눈여겨볼 겸해서 거리로 나섰다.
성당은 바로 근방에 있었다. 우리는 근대와 중세가 혼합된 아름다운 「쥬리히」의 거리를 감상할 수 있었다. 한 5분도 못가서 「리마트」강이 나왔고 조금 더 걸어가니 우리가 「택시」를 탔던 곳이 나온다.
『아니 이 친구들이 우릴 촌놈으로 알고 이렇게 가까운 곳을 꾸불꾸불 돌아서 「호텔」까지 갔나 원?』하고 한국적으로 「쥬리히」의 「택시」운전사를 의심을 해보기도 했다. 물론 길이 좁아 일방통행인 길로 되어있기 때문에 차를 이리저리 끌고 다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우리는 피곤을 덜기 위해 조그마한 맥주집에 들어갔다. 옆의 「테이불」에서는 「카드」노름을 하는 사람들이 우릴 살피고 있었다. 그중 한 친구가 이야길 건다.
『어디서 왔소?』
『한국이요』
『스위스의 인상이 어때요?』
『참 좋습니다.』
우리는 맥주집의 가족적인 종요한 분위기를 차분히 감상하면서 맥주를 즐기고 있었다. 그때 아까 이야기를 걸었던 중년남자 한사람이 우리자리에 맥주를 보내주는 것이었다. 자기가 한턱 쏠테니 마시고 싶은대로 들라는 것이다.
『지금부터 드는 건 내가 내죠』
한턱을 써도 우리가 시킨 몫과 자기가 낼 몫의 한계가 뚜렷하다. 우리는 내일 여정을 생각해서라도 시켜준 두병 이상을 욕심낼 수는 없었다.
「호텔」에 돌아왔다.
『원 별친구 다있군…』
친절을 받고도 얼떨떨해진 「쥬리히」의 첫날밤이었다. 43만명의 인구가 어디에 있을까 싶을 정도의 조용한 「쥬리히」의 밤이다.
『자 신부님 주무시죠?』
『근데 태민씨 코나 골지나 않는지?』
『글쎄, 평소엔 곤다는 소린 못들었지만 혹시 고단해서 골지도 모르겠는데요.』
『그래, 그럼 야단인데, 잠이라도 실컷 자야 피로가 풀리겠는데』
나는 신부님이 나때문에 조금이라도 불편이 생길까 두렵기만 했다.
신부님은 씨익 웃으시면서
『자, 그럼 또 복사노릇을 해줘야지!』 하더니
『자, 양복을 벗어요?』 하면서 웃저고리를 벗겨준다.
신부님은 환자의 간호 때문에 독방차지도 못했던 것이다.
『태민씨 덕분에 숙박비 절약이 되어 다행인걸』 하고 대해주는 것만도 고맙기 한량없었다.
잠을 청했다. 그런데 잠이 안온다.
미열이 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고 부스럭거릴 수도 없다. 못주무실까 걱정하시던 신부님은 자리에 눕자 5분도 못되어 코를 골지 말아달라고 간곡한 부탁을 하시던 신부님이 코를 골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저으기 마음이 놓였다. 고단을 풀기위해 푹 쉬어보겠다는 뜻만은 이루어진 것임에 틀임없기 때문이다. 내 시중 들어주시느라고 얻은 갖가지 피곤을 푸시는 신진대사운동의 하나로 코를 고는 것이 한편 고맙기까지 한 스위스 여행의 첫날밤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