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行進(행진) 收容所(수용소) 살이는 이러했다
산 殉敎者(순교자)들의 證言(증언)
분도會(회) 修女(수녀)들의 受難談(수난담)
英雄的(영웅적)인 信仰心(신앙심)만이 生地獄(생지옥)쳐 이기게 했다
分断(분단)의 惡循環(악순환) 共産主義(공산주의)와 戰爭(전쟁)과 悲惨(비참)…
8·15와 소련군진주, 억압과 감금, 죽음의 행렬, 수용소살이 등 몸서리쳐지는 그날을 한마디로 표현못하고 독일인 젤드루드 수녀(전원산수녀원장, 현대구성베네딕도회수련장)는 「침통」을 이기려 애쓴다. 감방과 감방을 거치고 낭떠러지인 「옥사독」(독일인신부·수도자수용소가 있던 곳)서의 생활이 15년이 지난 오늘도 처절했던 그날들이 그대로 떠오르는 지벨드위나 수녀(함흥분원장, 현대구수련허원자지도)는 진저리를 친다. 일각(一刻) 또 일각의 1년반, 뼈를 깎는 고초의 연속은 굶주림, 병고, 폭서와 혹한, 불안과 질식의 반복이었다.
마텔원장(현대구수녀원)은 『그러나 지난 20년을 그리고 언제 끝날지모를 형고(刑苦)에 허덕이고 있는 형제들을 생각할때 우리가 겪은 것은 과거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산순교자의 계속중인고초를 더듬는다. 뼈를 묻고 살을 나누며 사랑하던 신자들, 동료수녀와 헤어져야했던 49년 5월 11일, 『내게 닥칠 1시간 앞이 캄캄은했지만 정말 발이 떨어지지 않았고 게다가 우리 박수녀님(골롬바·전원산부원장·현대구부원장)이 심장마비로 졸도를 하고…』 젤드루드 수녀가 회고 한다.
『우리를 괴롭히는 일은 인민군이 도맡았나봅니다. 어떻게든지 올가미를 씌우고 티를 잡으려고 나중에는 수녀를 「스파이」 앞잡이로까지 유혹 하잖아요』
벨드위나 수녀는 자주 그 앞을 지나던 함흥형무소만 보면 『언젠가 내가 저기들어갈 것이라』고 「아이로니칼」한 예측을 했었다. 『끝내는 거기서 우리 4명이 독방에 갇혀 2개월을 벙어리가 돼야했고 숨도 제대로 쉬지못했는데 정신이상(발광)되지않은 것이 이상도 했읍니다』
『풀독으로 설사는 계속하면서도 산에있는 풀의씨를 말리다시피 먹어야 견딜 수 있을』 정도였었고 『앓고 누웠으면 식량을 3분의 1로 줄이는 통에 숨이 붙어있는 한 몸을 이끌고 일하려 애썼다」니 기막힌 이야기다. 하루 1합의 옥수수가 모두 68명의 신부 수도자중 1년반동안 26명이 굵은 끝에 병들어 죽어갔는데 『예 만약 이북엘 간다면 「옥사독」 산비탈에 별장이나 아니 성분도회 관상수녀원을 짓고 거기 눈도 제대로 감지못한채 숨진 벗들을 오래오래 기념하고 싶다』고 했다. 『당시 우리의 큰 걱정 하나는 누구일지, 마지막 숨질 벗을 누가 묻어주나』하는 것이었다.
하루 14시간의 중노동, 인민군이 입었던 때와 이의 범벅인 누더기를 남녀수도자가 가릴수 없이 입었었다. 『부모와 집을 잃은 우리는 유랑배(流浪輩) 지요』 박골롬바 수녀의 이야기다. 가는 곳마다 뒤쫓기면서 식모살이로 이동리서 저동리를 헤맸었다.
끝내는 그중 6명 수녀가 다시 체포되어 지금도 행방불명자로 기록돼있지만 『평복을 하고 치마꼬리도 천년스럽게 잡으며 보통 부녀행세를 해도 용케들 우리를 알아냅디다』고 박수녀는 정치보위부원들에 감탄도 했다.
『어떤 수녀는 재령서 강화길을 안내자에게 속아 세번이나 헛탕걸음을 했고 기차로 오던 사람들도 찬바람속 지붕서 떨어질번도 하고』고 고초는 이루 말 할 수 없다.
『평양감옥서 「옥사독」서나 괴뢰군들도 우리의 명랑한 모습에 감탄했지요. 그러나 우리가 지금도 놀라움게 감사하는 것은 천주님의 사랑입니다』 그 고초속에, 감시가운데서도 미사를 계속드릴 수 있었고 밥주걱에다 성체를 받아 영한 것이나 눈치는 작업중 잠간 스치는 그사이에 고해성사를 볼 수 있었던 일이나 『이런것들이 어떻게 예사롭다고 생각할 수 있느냐』고 반문을 하면서 어떤때는 밥을 먹다가 혹은 먹은 다음에야 영성체도 하고 썩은 찌꺼기 곡식속에서 골라모은 한주먹의 밀, 야생초 머루로 면병과 포도주를 만들수 있었던일, 헌가방의 자물쇠로 감실을 보존했던 일.
신앙하는 신비스런 희열에 젖은 그들은 산지옥을 쳐이겼고 공산당 간수들의 감탄을 사고도 충분했다. 이런 지난날을 되새기며 젤드루드 수녀는 『글쎄요, 또 이런일에 부닥치고 순교를 한다 생각하면 선듯 자신이 생길지는 의문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확언할수 있는것은 천주님은 그런 고난을 당할때는 반드시 우리에게 용기와 신덕을 주시고 순교할 수 있도록 성우를 주십니다』고 확신하고 있다.
마텔 원장수녀는 감옥살이나 죽음의 행진길에서도 헤어진 형제를 위해 기구않은 날이 없었다고 했다. 그 덕택으로 그들이 독일에 닿기전에 벌써 한국인수녀는 남한으로 피난할 수 있었다. 이 소식을 독일서 들은 일행은 건강의 회복을 기다릴수도 없을 정도로 조바심을 태웠고 비행기가 한국에 가까와지면서 시야에 들어오는 강과 산땅과 집들, 그러나 이것들은 눈물에 가리우고 말았다고 벨드위나 수녀는 잊혀지지않는 감회를 들려준다.
그리곤 『이곳이 나의 고향입니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날이 이북서 헤어지고 체포된 만7년되는 바로 그날. 대구서의 재회(再會)했던 감격적인 광경은 상상하고도 남는다. 이 우연의 일치가 또 있다. 원산·평양·서울 등지로 뿔뿔이 헤어진 한국수녀들이 51년 4월 9일 부산중앙성당에 약속한 듯 같은시간, 장소에 모인 것이다.
『무조건 가고싶어요.』 남북통일의 앞날을 상상한다.
『글쎄요 기구나 독서 등은 불가능할 것이고 지하에 숨어서 밖에 신앙생활을 못할 거예요.』 이북의 오늘을 예상한다. 『자유를 얼마나 갈망하느냐는 6·25때 피난 못한 동포들이 이해할 것』이라면서 『신앙 가진자는 무조건 고생하는 것은 뻔한 일』로 단정했다.
『우리의 경험으로 이북의 형제들이 얼마나 우리의 기구와 보속을 기다리는지는 뼈저리게 안다』고 강조도 했다.
북진의 날을 대비해서 우리의 할일은 성직자 신학생 수도자 평신사도 양성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그 나머지는 천주님 섭리에 맡기자』면서 힛틀러의 패망을 생각하면 『우리도 결코 실망할 수 없고 「자유의 날」이 내일이 될지』도 알수 없다고 믿는다.
『북한에 남은 5명의 수녀, 불가리아의 분도회수녀들을 위해 우리는 만과때마다 그리고 이북의 형제를 위해 기구하고 있다』고 원장 마텔 수녀가 설명해주었다. 우리도 해야 할 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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