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 갈까>
갈곳이 없다.
이북 출신이니 남한 땅에는 친척도 없다.
빨갱이 천하가 되고 보니 이웃이 다 빨갱이처럼 보인다. 서로 터놓고 말할 이웃도 없다.
내가 언론계의 대단한 인물이 될수는 없었지만 그들이 말하는 이른바 「반동신문사」의 반동기자일 수밖에 없었다.
집에서 내게 닥쳐올 운명을 앉은채로 기다릴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가있을 곳도 없다.
더우기 누나(당시 경기여고 교사)는 당시 우리 정부의 요인의 자제분 C군을 피신시키고 있었다.
나는 C군과 함께 명동성당으로 피신했다. 가톨릭문화관 지하실에는 서로의 신앙을 의심하지 않아도 좋을 교우군인 교우경찰들이 숨어있었다.
6월 28일부터 약한달되는 동안 성당구내서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면서 나날을 보냈다.
괴뢰들은 처음에 불란서 신부님인 공신부 우신부님을 한국인 유영근(요안·서울교구당가신부) 신부와 함께 체포해갔다.
불란서 신부님들은 체포되기까지 숨지도 않았고 밖에 나와 경문을 읽기도하고 우리들한테 농까지 거는 것이었다.
『우리 비행기가 와서 우리 있는곳 폭격해주는것만 기다리게 돼죠?』
눈을 꿈벅 꿈벅 하시면서 『아무말 말고 기구해요』하기도 했다.
당시 구라파에 가계신 노주교님의 방과 주교댁 접수명령이 내렸다.
우리 교우 청년들은 주교댁 짐을 지금 여자기숙사 쪽으로 나르기도 하고 중요한 것들을 비밀리에 피난시키기까지 했다.
그런때 예전에 성가 기숙사(가톨릭남기숙사)에 있었던 국군대위 홍하표란 사람이 사복차림으로 지겠군에 업혀 나타났다.
나를 보더니 반가워한다. 『날 좀 살려 주어, 다리에 관통상을 입었는데…』
길거리에 나갈 수 없는 나는 누나에게 의사 왕진을 청탁하고 우리들의 피난처 지하실에 뉘어놓았다.
말하자면 누나는 내 청으로 적십자정신을 발휘하여 의사를 댓고 밥도 날라주었다. 홍대위는 한달만에 일어날 수가 있었다.
용감한 그는 『고맙다』는 말한마디를 남기고 훌쩍 거리로 뛰쳐나갔다.
명동 구내 일대가 그들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자 우리 일행 약8명은 여자기숙사로 장금구 신부님을 모시고 고아들과 수녀님들과 생활을 같이 하면서 유엔군의 반격날만 다리고 있었다.
〈고아원의 일군>
여자기숙사에서도 내 쫓기게 되었다. 신부님을 따라 이사짐도 나르고 하면서 충무로 2가에 있는 무슨 학원건물로 가게 되었다.
이 건물은 괴뢰들이 바오로 보육원건물을 뺏으면서 고아들이 가있을 곳으로 정해준 곳이라 했다.
우리는 고아원의 일군으로 가장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가장이 아니라 사실 일군노릇을 하면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
고아들에게 시달림을 당하는 수녀님들의 고생을 매일 목격하면서 살았다.
그런데 어느날 뜻밖에도 괴뢰 내무성 소속 교향악대가 같은 건물안으로 들어왔다.
우리는 이들의 감시를 받으면서도 매일 장신부님 집전의 미사례를 고아들의 보육일정표에 의해 할수가 있었고 괴뢰군 가운데서 가톨릭신자를 발견할 수도 있었다.
함경도 출신인 한 여자 대원이 눈치를 살피면서 귓속말을 건다.
『나도 영세한 교우얘요. 신부님뵈오려면 어떻게 해야 되죠?』
신부님도 사복을 입으셨으니 신부님을 쉬 발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내놓고 고아지도원처럼 고아들속에 끼어 기구도 했으니 천주교신자인 것을 그들은 알았기 때문이었다.
<사람 사냥군들>
그후 우리는 8월 하순에 고아원과 함께 또 동국대학 앞의 어느집으로 이사를 했다.
젊은 사람을 이잡듯 잡아내는 살벌한 때였다. 한밤중에 괴뢰들이 포위하고 「사람 사냥」하러 들어왔다. 간이 콩알만해진 우리는 고아들 잠자는 틈바구니에 끼어 「예수 마리아」만 찾으면서 자는체하고 누워 있었다.
구두발 바람으로 괴뢰들이 들어왔다.
『저 놈들은 누구요?』 앙칼진 괴뢰의 살벌한 목소리가 울렸다. 수녀님은 침착한 어조로 『우리 고아원 직원입니다. 쌀배급도 타야되고 또 애들을 위해 힘든 일 봐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때 『이봐 일어들나』하고 하는 날에는 꼼짝못하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잡혀가게될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조사가 점점 심해졌다. 「유엔」군의 반격이 어떻게 됐나 궁금해지기도 했다.
지금 부주교인 김창석 신부님은 이같은 위험한 공기속에서도 인천을 곧잘 갔다오시군 했다.
장금구 신부님은 용산에 계신 이재현 신부님한테 좀 갖다오라는 분부였다. 『지방교우들의 소식으로는 비행기에서 머지않아 유엔군의 반격이 있을 예정』이란 비라를 뿌렸다는 정보를 확인해오라는 것이었다. 이재현 신부님은 『저 한강변에 폭격하는 광경을 봐요. 상쾌하지』하시면서 「유엔」군의 폭격권내의 용산신학교 건물안에서 「예수성심」을 묵상하는 가운데 앞날을 점치고 계셨다. 며칠후 이신부님이 괴뢰들에게 끌려갔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그것이 이신부님과의 마지막 이변이 될 줄이야. 함께 고아원에 숨어있던 김경하(現曉明高等實業校長)형님과 교우군인 등 몇은 당분간 산속으로 피신한다고 떠났다. 마침내 4명가량의 젊은 사람만이 올때갈때 없이 그냥 고아원에 머물러있었다.
내 동생(당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1년)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형! 빨리 내빼! 집으로 형잡으러 왔다가 누나만 잡아갔는데 이리로 올거만 같아.』
난 구라파에 가서 안계시는 한창우 선생댁으로 갔다. 사모님이 걱정스러이 피신장소를 제공해주신다.
철없는 어린이들은 밖에서 괴뢰군이 문을 뚜드리는 눈치만 보이면 마루밑으로 빨리들어가라고 신호해 준다. 마루를 뜯고 엉금 엉금 기어들어가는 3명의 어른꼴이 무척 우습기만 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눈치빠른 애들은 이상한 사람이 오면 시침이를 딱떼고 천연스럽게 『…님은가고 없어도…』의 노래를 연거푸 하는 것이었다.
나는 마루밑 속에서 「바위고개」의 노래를 그들한테서 배웠다. 누나도 내 동생도 모두 나대신 정치 보위국에 잡혀갔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바로 내가 치료 알선해준 홍대위가 체포당해 큰욕을 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대한 비밀 지하공작대」의 조직을 하다가 잡혔다는 것이며 영문도 모르고 있는 내가 부책임자로 되어있고 내 누나와 내 동생이 무슨 연락책임자같이 도표에 그려놓았더라고 석방 되어나온 열다섯살짜리 여동생이 말해주는 것이었다.
나는 캄캄한 마루밑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홍대위를 치료해주도록 의사를 소개 해준 죄밖에 없는 사람에게 어마어마한 죄명을 내 누나와 동생에게까지 씌운것이 원통했다.
『바위고개 언덕을 혼자 넘자니…』
지금 북녘 어느 하늘 밑에서 감옥살이를 하고 있을는지 또는 벌써 천당에 가있을는지 생사조차 모르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이젠 오직 「남북인사」 명단에서만 볼수 있는 누나와 동생이 되고 말았다.
『주여! 망자를 위하여 빌으소서』
이렇게 기구할 수도 없고 연미사를 드릴 수도 없다. 매해 9월 4일만되면 생미사로 그들의 영혼을 추억하고 주님의 보호아래 살아 있기를 기원하는 마음뿐이다.
申泰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