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예루살렘」에 올라가신다. (요왕 2·13) 바야흐로 구속의 열매는 여물어가고 있다. 천지창조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엮어진 또 엮어질 역사는 인간대 천주의 역사요 순 인간의 역사가 아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역사를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천주의 인간에 대한 역사에 참여할뿐, 따라서 천주는 역사의 근원이 되고 주연이요 주인공이다.
낙원에서 쫓겨난 아담은 방랑하기 시작하고 정처없는 나그네가 되었다. 날이 가고 달이 바뀌고 해가 넘어갈수록 본향을 영 잃게 되었다. 그래도 자비로이 구세주를 약속했던 천주는 이제 이 약속의 실천 방법으로서 이스라엘을 택하였다.
그런데 이들마저 은혜로운 주를 또 멀리하여 머나먼 에집트에 가서 노예가 되었다.
다시는 주께 돌아올 수 없는 백성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그곳은 영원히 살곳은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한편 고장인 「가나안」 복지로 돌아가고 싶은 향수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짙어가기만 했다. 그들은 타향에 살고있는 것이다.
이를 측은히 여긴 천주는 그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으셨다. 오녜의 몸인 그들을 에집트에서 구출하여 홍해 바다를 무사히 건느게 하고 광야로 이끌어 많은 전쟁을 겪은 다음 드디어 약속된 땅, 본향에 들어가게 하였다.
그래도 왜그런지 그들은 천주의 뜻대로 역사를 꾸미질 못했다. 언제까지 방랑자가 될 셈인지…
그래서 천주는 이 구원의 역사를 직접 담당하게 되었다. 시공의 제약을 맏는 인간, 예수의 출현이다. 그는 아담이 실락원에서, 이스라엘이 에집트에서 처럼 현세에 영주하러 오신게 아니다. 「다볼」산에서 영구히 천막을 치자던 베드루에게 한마디 대꾸도 아니하였다.
그는 언제나 자신을 나그네로 표방하였다.
『내 나라는 여기 있지 아니하니라』(요왕 18·37)
그리고 늘 본향인 성부께로 돌아갈 말씀을 하였다. 『나 지금 나를 보내신 자에게로 돌아가니…』(동 6·5 동7·33 참조) 부활후에도 그는 「엠마우스」로 가는 두 제자와 같은 길손이었다. 성주간을 기해 인간에 대한 유구한 천주의 역사목표, 유일 최대이 목표인 구속은 눈앞에 다가왔다.
예수는 급히 서두른다. 이에 앞서 이스라엘과 맺은 옛 계약(구약)과는 달리 자신의 피로 새로운 계약(신약)을 맺었다. 이로써 「새로운 백성」이 태어났다. 이스라엘 백성만에 국한되지 않는 『온갖 민족과 온갖 언어와 온갖 백성과 온갖 나라』(묵시 5·9)로 구성된 「새로운 이스라엘」이다.
그것은 『간선된 인종이며 왕다운 사제군이며 거룩한 민족이며(천주의) 소유로 간택된 백성』(베전 2·9)이다. 그것은 교회요 걷고있는 교회다. 아직도 본향에 못들어간 이 교회-나그네는 에집트의 노예상태로써 상징되는 죄에서 빨리 석방되어 홍해로 나타내는 성세의 물을 거쳐 세고(世苦)의 바다를 건너야 하고 광야로 표상되는 현세타향에서 이스라엘 백성처럼 『영원히 죽지않을 천상의 떡』(동 6·50-51)을 먹어야 한다.
만나를 먹던 이스라엘의 광야처럼 무인지경에서 기적으로라도 따르던 무리들에게 먹을 것을 잊지 않은 예수는 이 새로운 이스라엘백성에게도 먹고 마실 것을 미리 바련하였다. 자신의 살과 피를!
보라 성목요일, 건립성체대례가 아닌가!
예수, 나그네를 두목으로 교회, 나그네도 과객(過客)으로서 이스라엘, 나그네가 에집트에서 나을때 미리서 떠날 행상을 성급하게 먹듯, 한점 한획 같이 일분 일초도 어김없이 성부께로 바쁘게 돌아가신 예수 · 나그네처럼 교회, 나그네도 이 타향에서 망서리지도, 길가에서 어물어물하지도, 걸음을 멈추지도 말고 저물기전에 어서 바삐 가야한다. 행로가 험하고 멀고 지루해도 발길을 재촉해야 한다. 본향에 어서 가고 싶지 않은가? 향수에 깊이 젖은 마음을 달랠 것은 아무것도 없고 달갑은 일이 있을리 없다. 성조들처럼 『이 세상에 방랑자며 나그네임을 고백한다.
이렇게 말하는 자는 자기는 본향을 찾는자임을 나타낸다. 만일 그들이 떠나온 고향을 생각하였더면 (다시) 그리로 돌오갈 기회도 있었으리라마는 그러나 저들은 보다 더 나은 본향, 곧 천상의 것을 사모한다.』(헤브 11·13-16 참조) 그러니까 어서 죽어서 묻히고 다시 살아나야 한다. 이래서 본향에도 착한교회, 나그네는 제3의 백성, 천주의 백성이 되어 천상 「예루살렘」에 천년만년 살고지고 하게된다. 『대저 우리의 지상천막인 이 거처가 무너지면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지지 아니한 천상의 영원한 거처인 집을 천주께 받을 것을 우리는 아노라』 (코후 5·1) 그때까지 교회, 나그네인 우리는 『우리 천상 거처를 더 끼어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며 탄식하나니… 우리는 이 천막 속에서 압박을 받고 탄식하기 때문이다.』(동 2와 4) 한걸음 한걸음 다가가서 우리도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가자. 우리의 일생이 다 성주간이 되었으면.
崔益喆(서울 里門洞본당 주임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