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民族主義(민족주의) 假面(가면)쓴 共産(공산) 陰謀(음모)에 속고 있다」
社會(사회)의 不正(부정)과 腐敗(부패)등
非信仰人的(비신앙인적) 生活(생활)에 反撥(반발)
왜 크리스챤이 共産主義(공산주의)에 加擔(가담)했던가=比律賓(비률빈)서의 境遇(경우)
【NC 特信】 필립핀 공산당은 한때 정권장악에 거의 성공한 단계에 있었다.
그 당시 공산당안에는 가톨릭도 있었다.(필립핀은 인구의 85「퍼센트」가 명목상으로는 적어도 가톨릭이다) 그럼 왜 가톨릭이 공산당에 가담하고 있었던가?
이전 필립핀 공산군 즉 「훅」의 총수(總帥)였던 루이스·타룩과 공산당선전부의 간부였던 알프레도·사울로는 NC 통신에다 이에 대한 답을 하였다. 이 두 사람은- 타룩은 1954년에, 서울로는 1958년에- 정부에 귀순하였고 지금은 「마닐라」 교외 육군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본지 제476호 6월 27일자 제2면 참조)
그들은 본기자에게 그들이 공산당을 떠난 이유는 그것이 큰 환멸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들은 또한 공산당의 무신론적 주장에는 한번도 긍정한일이 없다고 말했다. 그들은 그 이전 가톨릭으로 자라났고 이제 몇해전부터 다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타룩은 가톨릭학교를 다닌일이 없으나 사울로는 2년간 가톨릭대학에 있었다. 『이념때문에 공산당에 가입한 사람들은 주로 공장노동자들과 지성인 들이었다』고, 타룩은 말했다.『그러나 농부들도 가담했으며 당시에는 공산주의는 순수 민족주의요 진보주의같이 인식되고 있었다. 농부들은 민족주의운동을 첫목표로 보았고 사회주의는 하나의 미래적인 가능성으로 이해하고 있었다』고 그는 부언했다. 다시 이어 타룩은 『전쟁전에는 사람들은 사회정의를 목전의 「프로그램」으로 보고 공산당에 가담했다.
항일(抗日)전쟁시에는 민족주의가 강조되었었고 사회주의내지 공산주의란 냄새도 풍긴일이 없었다.
「맑시즘」을 부내(部內)에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1944년 부터였다』고 말하였다.(나중에 중부 「루존」섬의 산중에 「훅」은 스탈린대학을 세웠다.)
타룩은 일부 가톨릭신자들이 공산당에 가입한 이유는 사회의 부정부패때문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어떤 가톨릭신자들의 비그리스도교적인 생활양식에 대한 불만은 오랫동안 지속돼온 것이었다. 사실 그 모순은 너무나 심한 것이었다. 이에 반하여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자들은 그들 주장에 따라 살고 있는것 같이 적어도 보였고 따라서 빈곤하고 망각된 대중에게 그들 주장에 대한 확신을 쉽게 줄수 있었다』고 말하였다.
타룩은 1938년 사회당이 공산당과 합류할때 전자의 서기장으로 있었다.
그는 당시 지성인과 반(半) 지성인들이 공산주의에 가담내지 동조하였는데, 그 주요한 이유는 그들의 양심이 사회부정에 대하여 반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하면서 『그들은 다 이상주의 자들이었다』고 지적하였다. 그들 중 하나가 그 자신이었다.
타룩은 공산당내에서는 두가지 부류의 사람들이있는데 하나는 스스로를 변증법적 유물론자라고 주장하면서도 이상주의적 태도를 버리지못하는 사람들이요, 다른 하나는 철두철미 변증법적 유물론자이고 또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공산주의자들과 가톨릭으로서 그들과 동조한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 어울릴수 있었던가? 라는 질문에 답하여 타룩은 『우리가 합류됐을때 당지도자들은 종교를 문제시 않으려고 애를 썼다. 또 우리도 서로 상반된 의견에 대하여는 다투지 않으려고 했다. 한번은 동지들과 이탈하려고까지 마음먹고 있었다. 그럴때 그들은 종교문제를 학문적으로 토론해 보았을 뿐이라면서 우리를 만류했다. 그러나 그들은 뒤에서 이를 공박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여기서 그의 아내 린다 여사가 죽었을때 장례를 가톨릭예식으로 치루었기 때문에 중앙위원회에서 비판을 받았다고 술회했다.
알프레도·사울로는 1946년에 신문인과 노동조합간부로 있을때 공산당에 가입 했다. 그는 필자가 1950년 그를 처음 만났을때에는 아직 신앙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고 말하고 당시 그는 당에서 주목을 받고 있었다고 밝혔다.
이제로부터 15년이 지난 오늘에 필자와 다시 대면한 그는 왜 사람들이 공산당에 가입했는가를 회고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공산당에 가입한것은 사회에 대한 불신(不信) 때문이었다. 국가와 사회는 대중을 돌보지 않았었다. 나를 매혹케 한것은 「땅없는 자에게 땅을, 실업자에게 직업을 주라」는 공산당의 「슬로간」이었다.』
그렇던 그가 공산당에 대하여 환멸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1951년경부터였으며 그러나 무사히 떠나 기위해서 7년간이나 기다려야했다고 말했다. 타룩은 아직 「훅」 지도자로있을때 「자유를 위해 태어났다」는 자서전을 썼는데 그 책안에 「볼세비즘」을 찬양한 귀절은 그자신이 쓴것이 아니고 당의 지도자중하나가 삽입한 것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지금 옥중에서 「다시나서」라는 새로운 자서전을 썼다. 아직 출판되지 않은 이 책에서 그는 공산주의에 대한 환멸에서 「가톨리시즘」으로 다시 돌아오는 과정을 말하고 있다. 그는 이책을 역시 공산주의자였고 한때 「런던」의 「데일리·워커」지(紙)의 원집장까지 되었다가 1948년에 가톨릭으로 개종한 더글라스·하이드의 권고에 따라 썼다. 하이드는 타룩을 「마닐라」 감옥으로 방문하고 그와함께 옥중에서 6주간을 살았다.
타룩은 하이드 자신의 개종수기인 「나는 달리 믿었었다」는 책을 읽고 깊은 감명을 이미 받고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지금 『우리 가톨릭신자들은 신앙에 깊지 못하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위해 일어서 싸울만큼 깊이 파고들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또한 현대 청소년들이 이상을 찾고있는데 오늘날의 영화·텔레비·라디오 같은것은 퇴패적인것만을 청소년사이에 조장하고 있다고 개탄하였다. 그는 『현대의 청소년들은 「비젼」을 요구한다. 그들은 그들의 삶과 행동의 목적을 찾고 이기주의적이 아닌 야심을 갈구하고 있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또 서방세계의 반공운동이 미지근하다고 불만을 토로하면서 민족주의적 가면을 쓰고있는 공산주의를 충분히 인식해야된다고 역설하였다. 그리고 공산주의와 관계되는 것이면 일체를 거부해야한다고 주장했다.
P·오코너 神父 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