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史學家 - 崔奭祐 神父(神博 · 가톨릭大 敎授)
敎會一致의 橋梁 役割에 期待한다
가톨릭교회와 영국교회가 4백여년만에 비로소 화해를 하기까지에는 교황 요안 23세가 공의회의 소집을 의도한 이래 상호간 꾸준한 접촉과 노력이 필요했음을 먼저 상기해야할 것이다. 「교회일치국」의 설립을 위시하여 전 「칸타베리」 대주교 피숴 박사의 「로마」 방문, 영국교회측에서 3명의 「옵서버」가 공의회에 참석한 사실 등은 오늘의 성공을 초래하는데 크게 기여한 것이다.
왜 영국이 「로마」 모교회(母敎會)를 이탈하게 되었는가를 생각할 때 너무나 우연하고 사소한 일에서 사건이 등단하였다.
루터가 종교 개혁을 창도하였을 때, 당시 영국왕인 헨리 8세는 오히려 그를 이단시하고 루터가 성사를 셋밖에 인정하지 않은데 분개한 끝에 「칠성사의 옹호」란 책을 저술하여 정통신앙을 변호하였고 그 때문에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신앙의 옹호자」란 존칭까지 받을 정도였다.
이렇듯 열심하던 왕이 돌연 교황을 배척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정비(正妃)인 카타린을 치우고 대신 일개 시녀인 보래인을 왕비로 세우려는 그의 색욕 때문이었다. 카타린과 이혼하려는 왕의 청원이 「로마」에서 거절되자 왕은 마침내 1534년 「로마」와의 단절을 고하는 동시에 영국왕을 교회의 새 주권자로 인정하는 선서를 전국민에게 명하게 되었다.
이어 박해의 선풍이 일기 시작하였고 대법관이던 토마스 모어 및 피숴 추기경 등 저명한 인사들이 선서를 거부한 죄로 「런던」탑 또는 단두대에서 목숨을 빼앗기었다. 이와같이 영국의 종교개혁은 다른 개혁 모양, 종교적이 아닌 정치적인 동기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영국교회는 곧 교리면에서도 프로테스탄화하기 시작하였고 다만 제도와 전례면에서 가톨릭적 요소를 많이 간직하였다.
19세기 이래 영국교회는 주로 3파로 나누어졌는데 우리 나라에로 전량되어있는 속칭 성공회라고 불리는 「고교회」(高敎會)는 가톨릭과는 그중 가깝고 교계제도의 사도적 연면성(連綿性)과 함께 원시 그리스도교의 전통을 고수하려는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반면에 민주주의적 노선을 따르는 「저교회」(低敎會)는 복음만을 주장하는 신교적 경향의 일파로서 청교주의적(淸敎主義的)이고 경건주의적(敬虔主義的)이다.
끝으로 「광교회」(廣敎會)라고 불리는 것은 독일의 유리주의적(唯理主義的)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파이다.
같은 19세기에 고교회(高敎會)에서 뉴먼을 중심으로 일어난 유명한 「옥스포드」운동을 계기로 하여 영국교회의 많은 인물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게 됨으로써 영국교회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는데 개혁이란 결국 그리스도교란 나무 줄기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고 그 줄기 자체의 것이며 이 줄기에서 끊길 때 그것은 개혁이 아닌 탈선임을 가르쳐 주었다.
우리는 이번 교황과의 회담이 상대방이 영국교회라는 점에서 유다르게 관심과 희망을 가졌다.
사실 영국교회가 특히 그중에서도 성공회가 가톨릭과 신교간의 중간적 입장에 놓여 있는데다가 교회적인 여러 요소와 더불어 원시교회의 전통에 충실하려는 장점을 지니고 있는 까닭에 앞으로 재일치운동에 있어서 지도적이고 중재적 역할을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한 것이다.
그러므로 일치를 위한 대화의 광장은 먽 가톨릭 교회 자신이어야 하고 대화의 상대자도 먼저 우리 가톨릭이고 대화의 대상 역시 우리 자신의 각성과 개혁이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또한 종교개혁을 이해하는데 과거의 그릇된 태도를 지양하고 새로운 정신적 태도로 임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종교개혁이 무려 4백년에 걸쳐 일로 발전하고 있고 그간 수천만의 영혼이 이를 신봉한 것이 거의 자기의 과실이 아니었다는 역사적 사실, 그리고 가톨릭은 진리의 독점소가 아니며 다른 곳에서도 종교적이고 그리스도교적 가치가 발견될 수 있다는 사실, 또 종교개혁은 천주의 구원사적(救援史的) 영원한 계획 안에서 어떠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 등을 이해해야 될 것이다.
이번 교황과 「칸타베리」의 램시 대주교와의 회담이 어떤 구체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고 해서 실망할 것이 아니다. 일치에 이르기에는 아직도 장애가 많고 이를 극복하려면 많은 인내와 항구가 필요하다. 4백년만에 비로소 두 교회의 지도자가 한 자리에 모여 서로 귀를 기울였다는 사실 자체는 이미 이 회담의 주요한 성과인 것이다.
■ 聖公會 - 盧大榮 神父(聖公會 미가엘神學院長)
敎會一致에 앞선 사랑 友誼의 交驩
聖公會 올바르게 理解해 주었으면
일반 한국 사람들은 성공회를 좀 알았으면, 성공회를 구교로 본다. 왜냐하면 검은 복식을 입은 성공회 신부와 수녀 그리고 성공회가 가진 칠성사 제도와 아름다운 예식으로 꾸며 있는 미사 예전은 모두 다신교 보다 천주교와 더 비슷하게 보인다.
그러나 요즈음에 「켄터베리」 대주교 미카엘이 교종 바오로 6세를 방문하셨으므로 한국의 언론계에서 성공회와 천주교 사이의 큰 차이를 더 뚜렷하게 나타낸 것이다.
성공회와 천주교가 서로 갈라지게된 이유가 영국 왕 헨리 8세의 이혼문제 때문이었다고 하는 말은 또 다시 나왔다.
그러나 그렇게 보면, 오해가 많겠다. 그 문제는 종교개혁시대의 많은 쟁론중의 하나의 덜 중요한 것이었다. 또한 헨리 8세 별세한 후에 영국교회가 완전히 교황에 다시 복종하게 되었으므로 오늘의 성공회는 헨리 8세 때부터 생긴 교회가 아니다. 오히려 엘리사벳 1세때에 창립된 교파라고 하여야 한다.,
엘리사벳 1세 때의 영국 종교문제는 타협의 문제이었다. 문제는 단지 로마교황과 분리하는것 뿐만 아니며, 역시 극단적 신교파의 길을 완전히 밟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었다.
성공회의 유래를 확실히 이해하려면 양쪽 신교와 구교의 이 성공회와의 차이를 연구하여야 한다. 성공회가 특별한 관심을 가진 문제는 성직이었다. 오늘까지 주교제도를 보존해와 있다. 천주교에서 성공회 성직의 유효력을 인정치 않는 의도는 성공회 교인들은 천주교에 대해서 가장 섭섭히 느끼는 일이다. 흔히 믿고있는 것은 1895년 교황 레오 13세께서 성공회 성직의 무효력을 선언할 때에 영국 천주교 주교들의 체면을 보아 주셨던 것이다.
성공회 교인들은 장차 교황이 그 선언을 취소할 수 있을 줄을 바라고 있지만 아쉽게도 빨리 그렇게 할 수 있지 못함을 알고 있다. 다만 「캔터베리」 대주교와 「로마」 교종은 이렇게 서로 만남으로 새 분위기를 만들었으므로 모든 신학적인 문제를 다시 보면 인간적 관계를 피하여 재고려할 수 있는 가능성이 아닐까 한다.
천주교 편에서 이 새로운 분위기를 만듬에 벌써 노력하고 있다. 성공회 교인은 몇주일 전에 「로마」에서 혼합결혼에 대한 새 규칙이 발표되었을 때에 감격할 수 밖에 없었다.
이왕에 영국에 있어서 천주교와 성공회 사이의 한 매우 어려운 문제는 이 천주교가 가지고 있는 혼합결혼에 관한 규칙이었다. 「캔터베리」 대주교를 환영함에 준비하신 중에 새로운 너글너글한 규칙을 발표하신 교황에 대하여 우리는 감사하여 마지 않는다.
바오로 6세의 예의는 놀랄만큼 교묘한 필치가 많다. 미카엘 대주교를 「시스디나」성당에서 만나실 때에 「파크스」로 인사 하시는 것보다도 손님 대주교와 곧 같은 의자에 앉으신 것을 우리는 잊을 수 없겠다. 또한 성 밖의 성 「바오로」 대성당에서 함께 공식 기도를 올린 후에 자발적 「제스츄」로 대주교에게 지환을 끼워 주신 것은 온 역사의 감동적 「클라이막스」이었다.
교황은 사랑과 겸손의 모범을 보이셨다.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으로써 하신 줄을 안다. 두 교파 사이의 어려운 문제를 이미 해결 시키실 수 없는 일이 아닌 줄도 안다.
그러나 그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 양쪽에 사랑과 겸손이 있어야 한다.
성공회 편에서 천주교의 불친절과 교만한 태도를 많이 느껴왓지만 사실 성공회 편에서도 시기와 불친절한 태도가 없지 않았다. 이제 성공회의 새로운 교만의 유혹도 생겼는데 곧 4백년 동안 국어로 미사를 보아와서 이제 천주교는 이와 같이 하게되었으므로 천주교는 우리 뒤에 왔다고 생각하는 교우들이 있다.
이런 태도를 없애야 한다. 교종과 대주교는 좋은 예를 주셨다.
어려운 문제를 어려운 것으로 인정하면서도, 서로 공경하며 사랑하며, 둘 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사업을 이루기 위하여 모든 힘을 쓰기로 약속하셨다.
이제 일반 주교와 신부와 평신도들에게 책임을 맡기셨다. 교종과 대주교가 시작하신 일은 우리가 같은 정신으로 이루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