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라파 겉 핥기錄(록) (22) 「쥬리히」산책
「리마트」강은 수도의 젖줄기
물고기 · 백조가 놀고
곳곳엔 동상들 서있어
발행일1966-04-10 [제514호, 7면]
한국있을때는 봉재때 아침 한끼만 굶는 대재를 지켜도 허기가 지고 맥을 못추게 되는 일이 흔히 있었지만 구라파를 다니는 동안 대체로 아침은 먹는둥 마는둥 해도 배고픈 것을 모르고 지내는 수가 많다.
유신부와 나는 달걀 「후라이」에 「햄」 한조각만을 먹고 거피로 입가심을 했다.
이것이 아침 식사다.
처음 외국에 가서 누구나 느끼게 되는 것은 매일 점심, 저녁때 각종 고기요리를 먹을때마다 한국에서 김치조각이나 놓고 끼니를 에우는 한국식구들의 식생활을 생각하게 되는 점이다. 그들은 아침 정도는 커피 한잔으로 때워도 육식 생활에서 얻은 여력이 있어 견디기 수월한 잇점이 있다.
구라파의 성찬을 앞에 놓고도 고기는 곧 물리고 한국에서 먹던 된장, 우거지국 생각이 간절하고 김치 생각만 나게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신부님! 시내 구경이나 나가십시다요.』
『기왕이면 설설 걸어서 다녀보지』
우리는 항공회사에서 얻은 지도한장을 손에들고 「쥬리히」 산책에 나섰다. 조금 걸어가보니 성당으로 들어가는 정문이 있었다. 아니 정문이라기 보다는 문이 안달린 층층대가 있었고 그 어구에는 약 2「미터」가량 높이의 바오로 종도의 부각이 성당쪽으로 손짓하고 있었다. 현대적인 선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리 오래된 조각품 같지는 않았다. 그 옆에는 천사와 같은 어린애가 오줌을 싸는 분수 조각품이 있었다.
『자, 우리 여기서 기념으로 사진이나 한장 찍자구?』
우리는 바오로 성상과 천사와 같은 조각 앞에서 서로 「포즈」를 취하였다.
16세기때 가톨릭에 반기를 들고 이른바 「종교개혁」을 한 중심지라서 그런지 성당이 그렇게 많이 눈에 띄지도 않았고 수단을 입은 신부님이나 수녀님을 구라파 딴에서와 같이 많이 보이지도 않는다.
스위스의 최대 도시이고 동시에 상업공업 교육문화의 중심지라는 곳이긴 하지만 도무지 시끄럽지 않은 도시이고 더럽지 않은 곳이다. 그랴말로 정중동(靜中動)의 도시같기만 하다.
「즈네브」 호수로부터 흘러내리는 「리마트」강이 시내 한복판을 조용히 프르고 있었다. 서울시 인구보다 9분지 1밖에 안되는 43만명의 식구를 갖고 있는 스위스 최대의 도시인 것이다.
「리마트」강에는 살찐 고기들이 노닐고 있고 「고니」(백조)들이 관광객들의 시름을 풀어주고 있었다. 파란 물속에 들여다보이는 물고기를 잡아가는 사람도 없는 모양이다. 물장구를 치며 노는 「고니」떼를 욕보이게 하는 개구장이도 눈에 안띈다.
남들이 하듯 우리도 물고기에 빵부스러기를 노나주고 「고니」에게도 모이를 나누어 주었다. 이같은 풍경이 바로 번거러운 거리 한복판에 있는 것이다.
언덕위까지 빨강지붕이 그리고 흰빛별장이 녹음우거진 녹색빛깔 속에 파묻혀 있는 것이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인공적인 아름다움을 잘 조화시킨 한폭의 그림같은 도시였다. 모두 활기있어 보이고 발랄한 걸음걸이들이다. 피곤한 것은 피곤할 줄 모르는 것들을 보느라고 쏴다니던 우리 구경군 뿐이었다.
『다리가 아픈데 좀 쉬어 가지?』
유신부님은 마침내 역앞에 자리잡은 식당으로 들어가자고 제의한다.
『난 수술한 팔이 무거워 쉬었으면 했던 참이었는데요』
마침 잘됐다 싶어 식당에 들어갔다. 영화에서나 본듯한 고급사교장 같은 식당이었다.
『기왕이면 이층 「베란다」로 올라가 바깥구경 하면서 먹지』
우리는 바깥구경을 하면서 점심을 먹었다. 바깥면에서 식사를 해도 먼지를 느끼지 않을 도시였다.
「쥬리히」 역전에는 철도의 창시자인 에스헤르상이 눈에 띄었다. 우리는 식당에서 나와 호수가로 연결된 번화가를 훑기 시작하였다. 은행 백화점 공원 등이 즐비했다.
17세기때 세워졌다는 「르네상스」건축의 「라타우스」시 공회당 「로코코」식의 건축으로된 「하우스 즘 레흐베르그」의 화려한 건축 등을 감상하면서 반나절을 보냈다.
『아니 저 잔디위의 동상은 또 뭐죠?』
나는 하도 많은 동상들 때문에 일일이 대수롭게 생각할 줄 모를만치 신경이 무디어졋다가 유명한 내력을 가진 것을 아깝게도 눈여겨 보미 못한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가보면 될게 아뇨』
신부님은 기왕 구경나온 김에 볼 것은 철저히 보자는 눈치였다. 가까이 가보니 새로운 교육의 시창자인 페스타로치의 상이었다.
이곳에는 스위스 땅에서 제일 크고 1100년에 건립되었다는 「로마네스크」건축의 대성당이 역앞에 있는데 두개의 「꼬딕」식 종각이 하늘 높이 솟아있는데 이제는 대성당이 아니라 예배당으로 됐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이 도시는 천주교의 도시라기 보다는 천주교에서 파문을 당한 성직자에 의해 다스려진 신교의 도시같은 인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