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15년이 지나 갔읍니다. 회고하여도 당시의 비참성을 지금은 그때처럼 실감 할수 없을 만한 시간이 흐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청 옆에 전시한 당시의 처참한 광경을 사진으로나마 보아야 다소나마 당시의 영상을 살릴수 있는 그러한 물질, 감각적이며 망각적인존재들입니다.
그러나 한국동란이 우리의 정신 내면에 준 영향은 시간과는 관계없이 지금도 미치고 있으니, 이는 인간이 과연 참으로 거대한 자부심과 욕망을 가지고 있으며 창조주이신 천주님을 떠나 자신의 교만을 발휘할때 자연 질서를 부수는 끔찍한 파괴자가 됨을 구체적으로 본 연고입니다.
이러한 비극적인 투쟁은 그때에 가시적으로 표현되었을뿐, 그후나 그이전이나 우리의 마음속에 계속 일어나고 있는 전쟁이 아니겠읍니까? 참으로 6·25는 항상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것이며 특히 그리스도안에서 형제된 우리는 묵과하여서는 안되겠읍니다.
무엇보다도 애덕을 위한 투쟁에 그러하였으니 곤경한 살림살이 가운데서 서로 도와가며 살아가는 수없이 많은 경우들을 볼수 있었으며, 특별히 교우들간에는 전보다 더욱 굳은 단결력과 화목을 느낄 수 있었음이 사실입니다. 또한 대전본당 오신부님 현광주 현대주교님등 여러 성직자들의 교우들에게 대한 극진한 호의는 잊을 수 없는 일이라고 모두들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생각을 돌이켜보니 다행히 안주교님은 일본으로 떠나셨고 이후로는 주인을 잃은 몸으로 또한 다음날 서울 오겠다던 꿈은 사라지고 남으로 피난길에 나서게 된 것입니다. 서정리, 평택을 거쳐 대전에서 잠시 머물렀으며 연달아 들려오는 후퇴소식으로 전라도 광주 여수 등의 낯선 고장을 들림과 아울러 전라도를 전략적으로 포기한다는 소식으로 부산까지 피난의 피난을 거듭한 셉입니다.
6·25라면 누구나 다겪은 피난살이라 의식주의 물질적 결핍으로 시작하여 가족과 헤어져 소식을 몰라 궁금함이란 인간의 상정이라 하겠읍니다.
그때 안주교님의 원에 따라 방주교님을 찾아 피난을 권한적이 있었읍니다만 예상대로 『지금 서울에는 노주교님도 안계시고, 많은 교우가 남아있으니, 서울을 비울수 없으며, 교우들은 할 수 있으면 빨리 떠나라』고하시니 저는 속수무책이었으며, 천안 심신부님 역시 못떠나시겠다는 말씀이었읍니다. 후에 방주교님은 그해 동짓달에 별세하셨고, 심신부님은 피살당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읍니다.
이제 우리는 먼저 가신 많은 교우들과 그들을 지키다 함께 가신 여러 성직자들 특히 외국인 주교 및 신부님들을 위하여 기구합시다.
김관택(평양교구 신우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