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敎會(한국교회) 百年(백년)을 지켜본 朴(박) 修女(수녀)의 生涯(생애)와 逸話(일화)
迫害(박해) 속에 핀 꽃송이
가마 타고 修女院(수녀원)에
市公館(시공관)서는 名講演(명강연)
平生(평생) 克己(극기) 勞動(노동) 淸貧(청빈)
지난 3월 13일 명동 바오로 수녀원에서 한국인 최초의 수녀 5명중 마지막 생존자이던 박 사베리오 수녀가 95세를 일기로 사랑과 인내와 겸손에 찬 그의 순결한 생애를 고요히 마쳤다. 실로 그의 일생은 민족이 비운에 찬 파란만장의 한말의 역사를 목숨으로 겪었고 무엇보다 박해의 여운이 가시기 전 바야흐로 흐려져가는 순교의 핏자국 끝에 한떨기 운명의 꽃처럼 피어나 그의 보속의 생애를 영원한 합장으로 바쳤다.
그의 조상전대에 이미 순교자 10여명이 났고 조부와 부친은 항상 그 무서운 경계망을 뚫고 용감히 주교신부 등 치명자들의 시체를 찾아 평화시까지 보존했고 교회를 사수하며 일생을 바친 분들이다.
다서살때 볏섬위에 올라앉아 아버지 등에 얹혀 70리 밤길을 포졸에게 쫓기어 달아난 적도 있고, 7세땐 밤험한 산길을 어른들에게 이끌려 피난하다 다리를 다쳐 그 상처를 죽을때까지 일생 앓았으니 그야말로 박해의 상흔을 산채 간직한 순교역사의 잔재다. 그는 천성이 영리하고 부지런하여 7세에 이미 회중앞에서 주일과 저녁이면 성서낭독, 성인전, 교회사 등을 도맡아 읽었고 가끔 신부님이 오셔서 식사하고 돌아갈 때 손구락에다 물을 묻혀 불어로 『고맙습니다』를 써놓고 가면 그것을 열심히 외워 쓰는 깜찍한 소녀였다.
그의 살짝 곰보는 오히려 더 매력이도록 귀엽게 생긴 얼굴에 어찌나 명랑하고 착했던지 황금으로 만든 달덩이 같다고 그녀의 애명이 활월(黃月)이라고. 1888년 7월 29일 나이 16세에 바오로 수녀원에 입원하던 날 조카딸 마리아(83세 현존)를 업고 뒷뜰에서 놀다가 어머니가 『수도원에 갈 가마가 왔다』하자 애기를 앞마루에 내려놓고 방에도 들어가지 않고 양친께 슬픈 내색하나 없이 작별인사를 드리고 그길로 가마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다.
처음엔 불란서 수녀들과 언어풍속이 달라 갖은 고초를 겪었으나 사전하나 없이 독학으로 곧 불어에 능달해서 불인들까지도 놀랄만한 학식과 유창한 웅변으로 불어강론까지 했으며 한국교회사 수도회사는 날짜까지 기억하는 산역사라는 별명을 들었다.
그는 일생을 고아 기르는 일로부터 시작, 수련, 수도자의 강론 통역 공동독서, 짐승우리 치우기까지 4·5명분의 일을 혼자 다할만큼 부지런하고 인내심이 있어 실은 79년간의 수도생활중 두손놓고 휴식한 일이 없고 소풍 한번 간 적이 없이 뼈빠지게 노동했으면서도 그의 입술은 쉴새없이 연령한 사랑의 화살기구를 읊었다.
근년에 와서 다리를 몹시 앓아 수녀들이 당신방을 소제하려 하면 굳이 사양하고 자기는 죽을때까지 일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
그는 보통 망령을 낄 그런 고령에다 굴신을 못하는 병든 몸으로 젊은 수도자와 똑같이 사소한 모든 규칙까지 다 지키는 실로 영웅적 노력과 굳은 신덕에서 아무리 젊은 웃사람에게도 절대로 믿고 순명하였다. 근년에 특별히 지정된 일이 없어, 젊어서 일 때문에 못다한 기구를 보충해야 겠다면서 깨알같은 불어 성경을 돋보기도 없이 탐독하고 아픈 다리를 끌고 매일 4·5차례 성로신공과 매괴신공을 바치고 남는시간에 바느질을 했다.
노경에 지팡이를 사들였더니 너무 사치스럽다고 대막대를 짚고 다녔으며 그는 일평생 한번도 발에 맞는 신을 신지 않고 크거나 적거나 혹은 기워서 불편한 신만을 신었다. 노령의 병중에도 음식, 약 그밖에 아무것도 스스로 청한 일이 없었고 혹시 선물로 「아스피링」과 사탕을 드리면 약은 먹고 사탕은 강아지를 주었다. 또 그는 짐승을 사랑하여 불편한 몸을 창에 의지하고 빵 부스러기를 비둘기에게 뿌려주며 마치 손자들에게처럼 정다운 이야기를 그들에게 걸었다.
이토록 온후하면서도 또 여걸다운 기상이 있었으니 한번은 길을 가다 두 장정이 어울려 마치 누구든 죽기를 결판짓는 치열한 싸움에 아무도 감히 무서워 말리지를 못하는데 그중간을 뚫고 들어 기여코 이들을 떼어놓은 일도 있다 한다.
83세 되던 어느날 서울시공관에서 윤락여성을 위한 모임에 시청 초청을 받고 강연을 했는데 모두 어찌나 감명깊었던지 간절히 부탁하여 두시간 연장강연을 한일도 있다. 그는 자신은 엄격한 극기를 했으나 남을 극진히 사랑했고 특히 병약자, 어린이, 짐승을 사랑했다. 살림살이를 맡아 시장에 갈 때 병 수녀를 위해 과자 과일을 따로 사서 일일이 찾아가 노나주고 위로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병석에서 간호수녀에게 항상 저녁이면 빨리가 자라고 재촉했다.
79년간의 수도생활중 3년간 인천에 가서 있었던 것 외엔 기나긴 세월을 명동수녀원 일우에서 눈에 뜨이지 않는 가지가지 어려운 일을 묵묵히 겸손되이 감내하면서 그는 오직 그리스도와 이웃에 대한 열절한 사랑으로 그 자신을 송두리째 바쳤던 것이다. 임종이 가까워올 무렵 모인 수녀들이 천당에가 그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을 때 『나는 한사람도 빠짐없이 다 기억하고 기구합니다』고 했고 얼마나 괴로우냐고 물으니 『예수를 위해 고통받는 것은 이세상뿐이니 모든 고통을 잘 참아 받아 기도를 바칩시다』고 했다.
그녀의 일생은 진실로 사랑과 겸손과 청빈과 순명의 생애로써 모든 수도자의 사표이며 또한 순교의 길을 살아서 몸으로 시현한 참다운 그리스도자의 모범이라 할 것이다. 성모여 당신의 착한 딸을 위해 빌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