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典禮(전례)] 말씀의 典禮(전례) 祭獻典禮(제헌전례) 重要性(중요성) 같아
聖體(성체)는 「生命(생명)의 빵」 말씀은 「眞理(진리)의 빵」
발행일1966-04-24 [제516호, 2면]
다음 세대 사람들은 교회 역사상에 한때는 사제들이 미사때 신자들을 뒤에 두고 알아듣지 못하는 「라띤」말로 천주 계시하신 말씀을 읽었던 때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되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근년의 전례 개혁으로 말미암아 미사의 두가지 중요한 부분인 「말씀의 전례」와 「성체의 전례」(EUCHRISTIC LITURGY)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헌장 56조)
그중 첫째부분인 「말씀의 전례」는 가르치는 부분이라는 것을 어린아이까지도 쉽게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
아직도 제대에서 모든 「독서」를 하는 것이 합법적이기는 하나 천주의 말씀을 선언하는 설교대와 제사를 봉헌하는 제대가 따로 두 장소에 거룩하게 모셔진다면 미사의 조직은 뚜렷이 나타날 것이다.
「준주성범」의 저자는 『자모이신 성교회에서 자녀들을 위하여 생명의 빵인 성체를 나누는 제대와 진리의 빵인 천주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대의 두개의 「테불」을 놓았다』고 하였다.
과거의 윤리신학자들은 미사의 첫째부분(봉헌경 전까지)을 참석치 않는 것을 다만 소죄밖에 되지 않는다고 가르쳤기 때문에 이 첫째 부분을 쉽게 빠뜨릴 수가 있었고 그 중요성을 뒤로 돌릴 수가 있었다.
그러나 초대 교회에서는 「말씀의 전례」를 얼마나 중대시 하였는가를 살펴보자.
3세기의 교회 작가였던 오리젠(ORIGEN)은 『오 주 예수의 성체를 너희가 받아 영할 때 거룩한 보물인 성체조각이 떨어질가 각별히 주의하라』고 경고하고 『그와 마찬가지로 성경을 읽을 때도 천주의 귀중한 말씀 중에 한 마디라도 흘려버릴가 특별한 주의를 하여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였다.
미사에 있어 「말씀의 전례」는 본질적인 부분이다.
그러므로 「말씀의 전례」를 경솔히 여기다가 참석하는데 늦는다면 천주와의 대화에서 절반을 빼어버이는 것이 되는 것이다.
▲천주께 말 하실 기회를 주자.
천주께서는 미사때마다 우리에게 당신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 그동안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셧다는 것과 또 앞으로 얼마나 사랑하실 것이라는 것과 또 우리가 당신께 무엇을 답례하기로 기대하시는지 일러주시고자 하신다.
「서간경」과 「복음」은 천주의 말씀을 우리에게 전달하여 준다. 그러나 「복음」은 서간보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대로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더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서간경」을 읽을 동안에는 앉아서 주의깊게 듣고 있지만 「복음」을 읽는 동안에는 일어서서 듣게된다. 「서간경」은 어떠한 소개하는 말이 없이 바로 읽는 반면 「복음」을 부제나 사제가 읽을 때는 우리관심을 현존하신 그리스도께 집중시키기 위하여 『주께서 여러분과 같이 계서지이다』한다. 우리는 이 말씀을 『주께서 여러분과 같이 계서지이다』라고 알아들을 것이 아니라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 지금 계십니다』라고 알아들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려고 오신 것이다. 또 사제가 『마테오에 의한 거룩한 복음이니라』 하면 회중은 『주께 영광이 있어지이다』하며 찬송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걸구하게 현존하여 계심을 알았다고 통고하는 것이다.
또 복음 끝에 『그리스도여 주께 찬미가 있어지이다』하며 회중은 다시 그리스도께 환호로써 맞이한다.
미사에 있어 「복음」의 선언은 성체 축성과 같이 거룩한 시객이다. 성공회가 지명한 성직자가 발언한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는 특별한 방법으로 현존하여 계신다.
따라서 신앙을 가지고 「복음의 말씀」을 듣는 모든 이는 그리스도와 개인 접촉을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복음」 안에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고 그 말씀은 특히 나에게 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갈릴레아」 산에서나 「제세마니」 호수가에서 발언하신 바로 그 말씀을 오늘 내 귀로 듣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오늘날 이 본당에서 내가 당신 말씀을 들을 것을 아셨고 또 이 말씀을 듣는 내가 어떠한 마음과 기분에 있을 것인가를 아셨으며 또 내가 어떠한 사명을 하여야 할 것인가를 아셨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특히 나를 생각하시어 이런 말씀을 하셨고 또 이런 행동을 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매 주일 성당에 나가면서도 늦었기 때문에 천주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을 듣지 못하고 나온다면 얼마나 원통한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