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건 신부는 이씨 조선의 제23대 왕인 순조(純祖) 21년 8월 21일에 충청도 강진(唐津)군 우강(牛江)면 솔매(松山里)에서 양반집안인 김해김씨의 안경공파(安敬公派)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그때의 우리나라는 청국(淸國)만을 대국으로 섬기고 그밖의 다른 나라와는 국교를 맺고 있지 않는 철저한 쇄국(鎖國)주의 정책을 쓰고있는 한편 양반(兩班) 중인(中人) 상민(當民) 노비(奴婢)의 계급제도를 엄격히 지켜 서로 혼인조차 하지않고 양반들은 주자학(朱子學)만을 받들어 조상의 제사만을 극진히 지내고 그밖의 다른 학설이나, 종교는 모두 이단(異端)이라고 보아 철저히 배척하여 국민으로 하여금 무당이나 믿는 원시적 신앙생활로 돌아가게 하였다. 그뿐더러 양반계급사이에서는 정권을 잡기 위하여 피비린 4색(四色) 당파싸움만을 거듭하고 국민을 못살게 들볶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이씨조선의 낡은 봉건(封建)주의의 사회계급제도와 어리석은 쇄국주의 정책과 온갖 미신(迷信) 행위를 타파하고, 적극적으로 서양의 근대적인 종교와 제도를 받아들여 이 나라를 근대화하고자 나선 영웅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김안드레아·대건 신부였다. 김신부는 이승훈(李承薰) 같은 남인(南人) 학자들의 자발적인 활동으로 이 나라에 천주교회가 세워진지 36년만에 태어났는데 그는 1814년에 옥중살이 10년만에 순교한 김비오·진후(震厚)의 증손자이었다. 이러한 순교자의 양반집안에 태어난 김대건은 어릴때부터 굳센 신앙심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1836년 1월에 입국한 빠리외방전교회의 신부인 모방(MAUBANT)은 곧 그를 신학생으로 뽑아 최도마 양업(良業) 최방지와 더불어 중국을 거쳐 「마카오」(碼港)에 있던 신학교로 유학하게 하였으니 이로부터 그의 조국근대화운동은 시작되었었다.
김대건들이 일으킨 조국근대화운동의 첫길은 바로 서양의 근대학술 사상을 배우기 위하여 조국을 떠나 멀고먼 「마카오」로 유학하였다는 사실이다. 그토록 엄격한 쇄국정책을 쓰던 이씨조선시대에 있어서 서양의 폴투갈국이 관리하고 있던 「마카오」섬에 유학간다는 일은 정말 그때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김대건 등은 오로지 조국을 깨우치기 위하여 이길을 떠났던 것이니 이 사실은 우리역사상에 있어서 서양의 학술을 배우기 위하여 떠난 최초의 해외유학운동이었다. 그러기에 김대건들은 「마카오」의 무더운 날씨와 싸우면서 프랑스 신부들의 가르침을 받아 라띤말을 비롯하여 서양의 역사 지리 철학 신학들을 1842년 2월까지에 모두 배움으로써 조국근대화를 위한 실력을 기르게 되었는데 이 사이에 무더운 날씨로 최방지거는 1838년 12월에 그곳에서 세상을 떠나고 조국에서는 1839년부터 두번째의 근박해인 기해(己亥) 고난이 일어나 모방신부들과 김대건의 부친인 김이나시오·제준(濟俊) 등 2백여명 순교하게되고 청국에서는 아편(阿片)전쟁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즈음하여 프랑스국은 청국에서 어떠한 이권(利權)을 얻는 한편 그 성직자들을 보내고 있던 조선국과 근대적인 화친조약을 맺기 위하여 그함대사령관 세실(CEECILE)로 하여금 두척의 군함을 거느리고 극동으로 나오게 하였다. 이에 세실제독(提督)은 「마카오」에 들러 김대건 최양업을 통역으로 쓰기 위하여 각각 그 두 군함에 태우고 1842년 8월에 양자강(揚子江)을 거쳐 남경(南京)에 이르러 영국과 청국사이에 남경조약이 맺어지는 장소에 참석하게 되었으나 세실제독은 이조약이 맺아짐을 보고 김대건들을 상해(上海)에 내려놓고 돌아갔다. 이로써 조선의 문호개방운동은 한때 멈추게되었으나 이후 김대건은 이 운동을 이룩하기 위하여 먼저 조국에 들어와 정세를 살피게 되었다.
그리하여 김대건은 1842년 12월말에 만주를 거쳐 국경인 의주(義州)에 이르러 비로소 기해교단의 소식과 그 부친의 순교사실을 듣고 입국을 꽤하던 끝에 1845년 1월에는 드디어 서울에 무사히 도착하게 되었다. 여기서 김대건은 2명의 신학생에게 서양학술을 가르치다가 몇달 후에 다시 상해로 건너가서 그해 8월에 신품을 받고 2명의 프랑스성직자를 모시고 다시 바닷길로 10월에 충청도 강경 (江景)으로 돌아와 전교에 힘쓰게 되었다.
이리하여 김신부는 바닷길로 서양사람들과 접촉하는 길을 처음으로 개척하여 조국의 근대화를 재촉하고 다음해 5월에는 황해도의 백령도(白領島)로 나아가 중국인교우에게 편지와 지도를 전하고 돌아오다가 잡히었다. 그는 옥중에서 조선의 대신들에게 세계지리색과 세계지도 두벌을 만들어 바침으로써 그들을 깨우치게 하였으나 끝내 그들이 내린 사형선고로 그해음력 7월에 이 나라의 근대화를 위하여 거룩한 피를 흘리게 되었다.
그의 순교는 말할것도 없이 이 나라에 참되고 올바른 종교를 널리핌으로써 사랑과 평화의 세상을 만들고자한 거룩한 뜻의 보람이었다.
이렇듯 김대건 신부는 26세의 짧은 생애를 오로지 조국의 근대화를 위하여 바치게 되었는데 그의 흘린 거룩한 피는 씨로되어 이후 끊임없이 성교회를 발전시키고 1886년에 맺어진 조선과 프랑스와의 수호조약에서는 마침내 이 나라로 하여금 신교의 자유를 승인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었다. 이에 따라 이 나라에서 천주교가 비로소 전교의 자유를 얻게되고 그밖의 다른 파의 그리스도교도 들어오게되니 조선정부는 1894년에 일어난 청일전쟁을 기틀로하여 이른바 갑오경장(甲午更張)이라는 정치계획을 일으켜 사회계급제도 등을 폐지함으로써 차차 이 나라를 근대화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로마」 교황청에서는 1925년 7월 5일에 김대건신부를 비롯한 우리 79위의 순교자를 복자위에 올리게 되었다.
柳洪烈(史學家·서울大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