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알려지지 않은 교회사] 全國(전국) 到處(도처) 殉敎聖地(순교성지)에 標識(표지)들 거의 없고
찾아야 할 곳도 數多(수다)해
발행일1966-05-08 [제518호, 4면]
오늘날 신앙하는 모든 사람들의 신앙의 불길이 쉴새없이 훨훨 타오르고 있다면 말할 것도 없겠지만 그렇지 못할 때 꺼져가려는 불길을 다시 살리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목숨을 바쳐서 천주님께 대한 사랑을 증거한 우리 조상들의 신심생활과 마지막 숨을 거두던 엄숙한 그 순간을 자주 묵상함이 얼마나 긴요한 일인지 모르겠다.
그러면 우리 후손들은 얼마나 그 성지를 보존해 오고 있는지.
새남터와 절두산 그리고 서소문 네거리에서 제일 많은 순교자들이 숨져갔다.
지금 약현성당 뒤가 옛날 합동이었는데 그쪽으로 건너가는 길 가운데라고 볼 수 있는데 서소문 네거리엔 기념될만한 아무런 표지가 없다.
다음엔 당고개이다. 처음에는 당고개에서 순교자들을 죽이지 않았는데 차차 순교자들이 많아지니 그만 당고개에서도 마구 죽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구 요셉 신부는 당고개 자리를 찾기위해 무척 애썼다.
효창공원 뒷쪽이라는 말이 있어 그곳을 헤매었지만 알아 내지 못했다가 우연히 한성지도를 보던중 당현리를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지점이 바로 어딘가 하면 용산경찰서에서 남쪽으로 우뚝 솟아 있는 장로교 성산교회가 서있는 곳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
성산교회 옆은 아직도 산 일보로 남아 있어 나무들이 여기저기 서있다.
그리고 성산교회 뒷쪽으로 높이 담이 쌓져있는데 이 담은 저수지 담이다. 담옆으로 고개길이 되어 있는데 담고개라고도 말하고 있었다. 바로 산밑에 집터가 좋은데도 일본사람들은 그곳이 치명터라고 해서 집을 짓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음엔 감옥이 있던 옥토가 어디인가 하는 문제이다.
심한 문초와 옥고로 순교자들이 숨지면 시체를 청계천 냇가에 그냥 버리고 했다는데 청계천 근처인 옥토 자리를 찾기 위해 구 신부는 단단히 결심을 하고 길을 나섰다고 한다. 청계천을 끼고 광화문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던 구 신부는 서린동에 이르렀을 때 그만 발길을 멈추게 되었다.
그것은 길 양옆으로 2층 집이 아란히 서있는데 한 지점이 텅비인채 이상하게 움푹 자리가 난채 들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옳다! 바로 이 자리가 아닐까? 이상하게 빽빽히 집이 들어선 서린동 거리에 빈터로 남아 있는 땅이 있다니 이상한 일이다. 바로 이 곳이 틀림없겠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마침 아주허리가 꼬부라진 할머니 한분이 구 신부 앞을 지나갔다.
<저 나이쯤 되면 옥토 자리를 아고 계실텐데…>
주십음이 많은 구 신부님은 할머니 뒤로 따라가다 그만두고 다시 용기를 내어서 따라가며 물었더니
『바로 여기가 모두 옥토자리랍니다.』
『고맙습니다.』
구 신부의 기쁨은 말할 수 없이 컸다고 한다.
이 서린동 43번지 옥토 자리에도 아무런 표지가 없다. 현재 이 옥토 자리는 주차장으로 되어있고 주차장 뒷쪽이 서린공원이다.
다음엔 노고산이다. 옛날에 마구 죽인 치명자들의 시체를 교우들이 훔쳐다가 노고산에 많이 묻었다고 한다.
치명자들의 무덤이 노고산에 있다는 것이 기록에 있어서 교회측에서는 알고는 있었지만 관심을 가지고 보호하려고 하지 못했기 때문에 성지로 삼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우리는 그래도 이렇게 아무런 기념탑이나 표지가 없는 성지를 기억을 하고 있지만 몇십년이 흐른 그 먼먼 옛날에는 이 성지들이 우리 후손들의 기억에도 남아 있지 못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안타까움이 가시지를 않아 병인 순교 백주년을 맞이하는 오늘날 우울하기만 하다.
더우기 사적에 기록된 수많은 순교선열들의 무덤 등을 알지 못하고 있으니.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