社會的禮儀에 대한 실랄한 評論家요 公敎로의 歸正者(신문교우)인 에블린 워는 晩年에 이르러 敎會 및 英國의 社會秩序 內部에서 일어나는 變動을 頑强히 反對하다가 享年 62歲로 4월 10일 別世했다.
워씨는 世界的으로 卓越한 小說家 중의 하나로서 널리 認定되었었다. 그의 가장 有名한 作品은 1945年에 發表된 「BRIDEDHEAD REVISITED)(브라이드세드의 再訪問)이었다. 3年後에 그는 「헐리우드」의 葬禮風俗을 풍자한 「THE LOVED ONE」(사랑받는 자)을 發表했던 바 그것은 映畵化되어 있다.
그는 復活主日, 地方聖堂에서 미사 參與한지 서너 時間만에 이곳에서 가까운 시골 自宅에서 운명했다.
그의 處女作 「DECLINE AND FALL」(零落)은 「옥스포드」를 卒業하고 나서 잠시 敎師職에 投身하여 어느 新聞에 連載햇다가 1928年에 내놓은 것이었다. 이 小說에서 어느 젊은 神學生이 「옥스포드」를 쫓겨나와 英國 社會의 上層에서 잇달아 일어나는 不祥事에 말려 들게된다. 이 作品은 英國의 因習에 대한 警句的이면서 辛辣한 解剖였는데, 그것이 그를 당장에 유명하게 만들었다.
「VILE BODIES」 「BLACK MISCHIEF」 「SCOOP」 等 그의 名聲을 높인 作品들이 發表되던 것은 1930年代였다.
그는 1930年에 公敎에 들어왔다.
그후부터 겉으로는 재치있는 儀禮의 喜劇으로 나타내지마는, 그는 자기의 깊은 宗敎的 信念을 스며들게 함으로써 作品의 줄거리에다가 새롭고 깊은 次元을 주었다.
「BRIDEDHEAD REVISITED」에 나오는 人物들은 그들의 生活이 公敎會와 接觸되는 限 意義를 가지고 나타난다.
小說 외에 그는 로날드 녹스 몬시뇰 · 헬레나 聖女, 英國 예수會員이며 殉敎者인 에드문드 캄피온의 傳記를 지었다.
「神經性 憂鬱의 가장 괴로운 해」를 넘긴 今年初에 그는 十字軍新史의 執筆을 中止하고 自敍傳의 둘째卷 著述로 돌아왔었다. 그의 自敍傳 첫 卷은 「A LITTLE LEARNING」이라는 題目으로 1964年에 出版되었다.
英國의 名士들과 그리고 그들의 쓸데없이 뽑내는 점잔과 터무니 없이 지껄이는 對話에 대한 調剌에도 不拘하고 자신은 構成된 社會와 貴族의 權利를 是認하는 무섭게 保守的인 人物이었다. 그는 나이를 먹을수록 英國 傳統의 辯護者로 自任했다.
新聞에 보낸 그의 公開狀, 雜誌에 실린 그의 論文은 傳統的인 社會 形態에 사정없이 挑戰하는 人士들을 反對하기 위해 두들겨진 것이었다.
그는 英國의 「라띤」語 미사協會의 會員인바, 그 會는 美國의 가톨릭 傳統主義運動보다는 덜 極端的이나 비슷한 「그룹」이다.
그는 英國과 그리로 어디서나 敎會의 傳統的 方式이 現代에는 다시는 더 適合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進步的 가톨릭들을 反對해싿.
個人的으로 말하면, 우오는 「가시돋힌」 氣質을 가졌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자기의 私域(PRIVACT)을 嚴重히 守護했다. 그는 上院議員을 包含하여 -이곳은 단 한번- 招待받지 않고 자기 집에 오는 사람의 눈 앞에서 대문을 쾅 닫아버리기로 유명했다.
그는 出版業者 兼 文學評論家의 아들로 1903年에 「런던」에서 탄생했다. 그는 「옥스포드」에서 史學을 연구하고 나중에 美術을 공부했다. 1935年에 그는 從軍記者로서 에띠오피아의 이탈리아軍 戰線全域에서 活躍했다.
第2次大戰이 일어나자 그는 入隊하여 「크레타」島에서 英國 海兵隊의 戰鬪에 參加하다가 유고슬라비아로 가서 티토 將軍의 遊擊隊에 民兵으로서 加擔했다.
한번은 유고슬라비아 上空을 날던 飛行機에서 脫出하지 아니하면 아니되어 뛰어내리다가 한 다리를 다쳤다. 그 飛行機에 탔던 사람으로서 살아남은 단 세 사람 가운데 하나는 윈스톤 쳐칠의 아들 란돌프였다.
그의 아들 오오베론 워는 小說 둘을 發表했다. 「ISLANE IN THE SUN」을 包含하여 12種 以上의 小說을 發表한 알레크 워는 그의 아우이다. 【NC 特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