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도 「유롭」에서와 같이 과학의 문화적 가치에 대한 그릇된 관념을 갖고 있지는 않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보통 학문을 人文的인 것과 自然科學的인 것으로 나누는데 이와같은 區分法에 따른다면 科學은 實質的으로 人間形成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현대에 와서 이와같은 科學에 대한 觀念이 그릇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는데도 불구하고 현대의 많은 과학자들은 科學이 처음에 시작될 때와 마찬가지로 餘興의 하나로서 일종의 지적 유희에 불과했던 시절의 유물인 이와같은 관찰을 열심히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과학과 기술이 인간의 환경뿐 아니라 인간정신에 새로운 면을 열어주고 있는 현대에 와서 그와같은 낡은 관념이 성립될 수는 없을 것이다.
과학은 생물학적인 인간뿐 아니라 여러가지 발명을 통하여 인간의 조건과 사명까지를 구명하여 준다.
이런 관점으로 볼 때 과학은 넓은 의미의 「휴메니즘」에 내포된다. 또 이러한 과학을 무시한 어떠한 인간형성도 결국 균형을 상실하고 기형이 되어버릴 것이다.
만일 「文化的」이란 語義를 『사람들 더욱 사람답게 하고 자연을 人文化하는 것』이라고 定義할 때 그 뜻은 더욱 명백해질 것이다.
과학과 기술은 자연을 알고 변형시키려는 행동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과학과 기술이 인간을 개조 · 변형시킨다는 사실은 현대에 와서 명백해졌지 과학의 초창기에는 기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과학은 인간자신에 작용하여 인간의 자질을 개발시켜주며 또 인간의 모든 사회생활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쳐준다. 그리고 종국에 가서 과학은 새로운 세계의 「비전」 즉 세계관을 갖게한다. 이는 人間精神에 새로운 면을 열어주는 중요한 요소 즉 人間史의 완숙 내지 성숙에 필요 불가결의 요소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과학과 기술이 인간 내지 문화에 끼친 공헌을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그 첫째단계는 個人的인 인간형성으로서 판단 및 지식과 깊은 관계를 갖고있는 資質의 啓發 등이며 둘째단계는 사회생활의 발전, 셋째단계는 우리르 둘러싸고 일어나고 있는 諸運動의 의미를 규명하려는 努力과 함께 세계의 새로운 「비전」을 통한 人間性의 완숙을 촉진하는 단계이다.
이와같은 노력은 과학의 본질이 진리를 탐구한다는 사실과 더불어 참된 정신적 가치를 우리에게 밝혀준다.
나는 여기서 앞의 두 단계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려진 것이므로 간단하게 말하고 셋째단계에 중점을 두어 좀 깊이 이야기하고자 한다.
■ 人間形成의 道具인 科學
연구한다는 직접적인 사실에서 뿐아니라 과학은 그 자체로서 커다란 교육적 역할을 갖고 있다. 이는 인간의 자질과 지식을 초보적인 수준으로부터 개발한다는 의미이다.
즉 식물학이나 동물학에서와 같이 자연과학의 첫 과제는 주의를 환기 시키고 관찰케하며 사실을 승복토록 하고 또 비현실적인 공상에 대해 알맞은 균형을 취하도록 하는데 있다. 수학과 정밀과학은 현재 여러분야에서 우리에게 정확하고 논리적이며 정밀하고 방법적인 체계를 세워준다. 만일 우리가 科學史와 위대한 발명의 역사를 더듬어 본다면 그 발명에 직관 전조 징후 암시가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알 것이다.
지금까지 과학은 우리가 보통 재래식 교육이라고 부르는 교육의 필수과목 즉 언어학이나 문학 역사나 철학과 같은 과목의 보충적 역할을 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으나 이러한 과학관만으로는 불충분하다.
근본적으로 과학은 부단히 알고자 하는 갈망에 답해왔다. 즉 과학의 본질은 진리를 탐구하는데 있다. 그러나 이것은 앞서 가학의 공헌에 대한 단계구분때 이미 말했다.
다음 제2단계에선 과학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기술이 주요한 역할을 한다.
■ 社會生活에의 影響
과학이 알려는 열망에서 출발했듯이 기술도 자연을 정복하고 지배하려는 욕망에서 촉진되었다. 이런 과학과 기술을 서로 독립시키는 데는 앞으로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현재 과학과 기술은 서로 깊은 상호간의 유대를 갖고 끊임없이 상대방에 작용하며 他方의 발전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요소가 되어있다.
기술은 과학의 발전으로 더욱 과학적이 되어가고 있으며 또 과학은 실험수단으로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고 있다.
어떻든 그것이 적절히 이용되기만 한다면 그들의 즉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결국 인류에게 봉사하며 인간이 복지에 이바지하게 될 것이다.
인간의 창조적 활동에 대한 가장 좋은 예로서 우리는 기초물리학이나 화학에서 성공한 「물질」의 정복을 들 수 있다. 또 자연에 조재하지 않는 물질을 만들 수 있을 때 우리는 창조란 의미를 가장 정당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의 좋은 예로서 수많은 「플라스틱」이나 인조섬유의 합성을 들 수 있다.
다음 우리의 생활과는 떼어놓을래야 떼어놓을 수 없는 「에너지」의 정복은 우리들의 발명이 갖는 윤리적 모호성의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가공(可恐)할만한 파괴력을 가진 폭탄을 제조하는데 사용되는 원자력은 얼마있지 않아, 1·2세기 후 석탄이나 유전이 고갈된 다음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될 「에너지」원(源)이 될 것이다.
또 「에너지」와는 깊은 관계를 갖고 있는 「수송」의 발달을 들 수 있는데 이는 경제계의 근본이 되고 있다. 또 사람은 세계 어느곳에나 가고싶어 할 뿐 아니라 상품의 교환을 원한다. 더 나아가서는 「아이디어」와 정보의 교환을 필요로 한다.
이와같은 필요는 광범위한 분야의 「대중전달수단」을 가능케 했다. 현재 운수기관과 대중전달수단은 지구상에서만 제한되지 않고 지상을 벗어날 만큼 확대일로에 있다.
다시 지상으로 눈을 돌릴때 그렇게 장관(壯觀)은 못되더라도 생활에 필수불가결한 「농경학」 「생물학」 「의학」의 발전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과학의 기술의 영역은 날로 확대되어가고 있으며 새로운 분야들이 사회악이나 소위 인문과학에서 처럼 속속 개척되어가고 있다.
인간본성의 성향(性向)으로 볼 때 과학과 기술은 우리가 그 참된 값어치를 정당하게 평가할 수 없을만큼 우리생활과는 밀접한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우리는 잠간 과학이나 기술이 없다고 가정해 보자. 비료, 강(江)의 범람이나 가뭄을 막아주는 「댐」, 상품의 교환을 위한 운수기관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일자리를 마련해 주는 산업이 없다면 아마 세계인구의 90%는 사멸하고 말것이다. 이같은 숫자는 과학과 기술이 인간에게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졌는가를 웅변해 주고 있다.
■ 世界의 비젼 精神的 影響
현대의 과학이나 기술의 보편성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의심없이 과학과 기술은 세계의 참된 보편성의 주요한 요소이다. 즉 과학과 기술은 세계에 깊숙히 파고 들어 세계 어느곳에서나 같은 상품 같은 양식(樣式)을 갖도록 하고 있다. 또 과학과 기술은 천태만양(千態萬樣)한 문화에 대한 상부구조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과학과 기술은 이같은 문화를 결실케 하며 풍부케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이 이같은 문화를 풍성케 하며 결실케 하는 데는 하나의 길을 따라서만 가능하다. 즉 새로운 세계의 「비젼」(소위 세계관)을 갖게하는 위대한 발명들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3개의 중대한 발명을 들 수 있다. 즉 시간의 무한성, 공간의 무변성 및 일반적 진화론-
■ 時間의 無限性
수세기전까지만해도 지구는 우주의 중심으로 여겨졌으며 시간은 반역사적(半歷史的)인 소설같은 것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이런 모든 것은 아직 인간적 규모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다.
현대의 인간은 그 자신과 지상의 모든 것이 의식할 수 없는 무한한 시간속에서 수십억년으로 해아려지는 항성과 유성의 역사속에서 또 수십억개의 은하계가 수백억광년으로 나타낼 수 있는 거리로 계속 팽창되고 있는 광대 무변한 공간속에서 그 자신과 지구를 상실하여 가고 있다.
■ 空間의 無邊性
그러나 이와같은 자기상실감에 비례해서 그와는 반대로 인간을 그와같은 광대한 시간과 상상을 절하는 공간을 알게한 인간정신의 능력을 자랑으로 여기게끔 되었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의 확대보다 우리에게 더욱 중대한 것은 세번째 언급한 진화이다.
■ 一般的 進化論
왜냐하면 진화는 우리에게 다음 두가지의 지식을 제공하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세계는 정적(靜的)이라는 것 즉 세계는 항상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상호 또는 부분적으로 상반되는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간단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적은 가능성에서 더 큰 가능성에로 끊임없이 이행(移行)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같은 운동은 완전히 무질서한 것 같으면서 일반적인 方向性 혹은 指向性을 갖고 있다. 마치 「진보」란 단어가 갖는 참된 의미와 같다.
세계는 과거에 생각하면 것보다는 훨씬 더 복잡하다는 것을 현대과학이 발견했다. 이점에서 가장 의의가 큰 발명의 하나는 거의 모든 자연의 본체(本體)는 얼핏 보기엔 서로 모순되는 것 같은 이중적인면, 즉 두개의 면을 가다는 「상보성의윤리」(COMPLEMENTARITY)의 발견이다.
■ 相補性 原理
물리학의 기본이 되는 본체는 미립자와 불연속의 상보성을 가졌다는 것을 현재 우리는 알고 있다. 즉 물질과 광(光)을 동시에 생각해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수학적인 기술(記述)을 빌지 않고는 동시에 나타낼 수 없는 입자(笠子)와 파(波)를 논해야 하는 것이다.
상보성의 원리를 발견한 위대한 과학자 보어(BOHR)씨는 이미 이 원리를 생물학에까지 응용하여 어떤 존재이든 생명을 가진 존재는 완전히 두가지의 면, 즉 물리적 화학적인 면과 생명적(VITAL)면을 갖고 있다고 했다.
이와같은 상보성의 원리가 인간에게까지 확장응용될 때 동일한 하나의 인간속에는 영성적인 것과 생물학적인 것, 즉 영혼과 육신의 활동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곧 상보성의 원리는 자연의 일반적인 원리이다.
진화에 있어서는 상보성의 원리와 겉보기에 상반되는 것 같은 면이 있다. 한편에서 우리는 가공(可恐)할 만한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을 알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는 소멸과 통일화에로의 그리고 「에너지」 사실에로의 가차없는 확률적 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에서는 진화가 우리에게 보려주듯 복잡화에로이 진보는 앞에 말한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과 모순되는 것 같이 보여진다.
그러나 그것이 속해있는 물리학적 세계 내에서 생각할 때 진화는 수세기에 걸쳐 특별한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왔다.
최근 과학은 이와같은 애매모호한 생각을 반성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브리유엥(BRILLOUIN)씨는 「엔트로피」의 법칙은 「인포메이션」을 뜻하는 용어로 보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인포메이션」은 우리가 연구할 각종의 대상에 대한 물리학적 관심을 유도할 것이다. 그러나 물론 진화는 인간의 정신을 극치에 이르게 하는 영구증가의 「사이키즘」(PSYCHISM=심령학)에 대한 지배적 우성인자를 알으켜주고 있다.
■ 샤르뎅 業蹟
떼이야르 샤르뎅(TEILHARDDE CHARDIN)의 업적을 인정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의 사상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이와같은 두면의 완전한 병행론 즉 물질과 의식 및 복잡화간의 법칙의 안과 밖을 이루는 상보성의 원리를 알고 있을 것이다.
몇해전에 별세한 샤르뎅은 예수회신부이며 동시에 저명한 지질학자요 고생물학자로서 종교와 자기가 가진 과학관을 조화시키기 위해 일생을 바친 과학자이다.
그당시 그의 업적은 충분한 평가를 받지 못했으나 샤르뎅보다 더 이와같은 상보성에 대해 깊고 힘있는 설명을 한 사람은 아직 없다. 현대의 제학문에 끼친 그의 영향은 지대하며 또 그의 저서들은 속속 여러나라말로 번역되고 있다.
지금까지 과학과 기술은 물질주의적 영향력만을 가진 것으로 간주되어 왔고 또 사실 가끔 그러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생각할 때 과학과 기술은 종교에 대한 유치한 관념을 없애주며 우리의 지식과 가능성과의 틈바구니를 메워줄 신의 존재를 요청해 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과학과 기술은, 순화하는 역할을 하며 완숙의 과정에 커다란 영향을 끼쳐준다. 한번더 우리는 과학발전의 영성적 영향력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또 우리는 세계의 이해력에 대한 기본적 신조(信條) 없이 과학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과학적 법칙을 규명하려는 연구이면 무슨 연구이든 명백하게 표현하고 있지는 않더라도 이와같은 신조와 이해력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이러한 과학관은 세계는 무의미하다고 하는 사상이나 현재 실존주의 철학자들 사이에 풍미하고 있는 부조리의 철학에 대한 좋은 해독제(害毒劑)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 과학은 과학의 영역을 벗어난 것을 추구해서는 안될 것이며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견해 사이에 개재(介在)하는 철학적 二律背反性을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과학은 철학적 문제 더 나아가서는 그 이상의 문제까지도 설정을 회피해서는 안된다. 적어도 현대의 사상가와 과학자들은 샤르뎅과 같이 자기들이 세계관과 지식간의 조화를 모색해야 한다.
끝으로 지금까지 말한 두가지의 생각을 집약하면 그 하나는 세계를 합리화 하고 또 그를 유기화 하려는 과학은 정신 앞에 자연을 승복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다음은 이 첫째 생각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으로 과학은 인간이 살고있는 세계의 성장해가는 정신에 작용하는 거대한 힘(DYNAMISM)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살핀 바와 같이 사상면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과학이 문화발전의 주요한 요소가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것인가!
뤼세 모랭 敎授(벨기 「루뱅」大學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