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알려지지 않은 교회사] 일본인에 어이없이 총살당한 만주 「용정」본당 박골라도 신부
총살 정당화하려 「계엄령」까지 선포했다니…
발행일1965-07-18 [제479호, 3면]
■ 1930년 만주전교비화
1931년 9월 18일에 일어난 「만주사변」에서 승리한 일본이 1932년 만주국을 승인하고 지배하려는 기세가 충천하던 당시의 일이다. 특히 그때 일본인들이 만주에 있던 서양 사람들을 싫어했던 사실은 이루 형용할 수 없다. 이럴때 분도회의 독일 신부들은 황막한 만주벌판에서 목숨을 걸고 매일의 성직자로서의 임무를 다했다. 그때에는 교우도 10리에 한사람씩 있었으며 한번 공소에 나가면 한달씩이나 걸렸던 어려운 포교상태였지만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은 그당시의 무시무시한 사회상이었다.
그때에는 비적(匪賊)들이 성당을 습격하고 불지르기도 하고 도둑질을 심하게 했기 때문에 밤에는 성당 감실안에 성체를 모셔둘수도 없었다. 너무도 외국사람들의 신변이 위험했던 탓으로 외국인에게는 보호용 권총휴대를 허락했다.
길을 가다가도 비적을 만나면 가진물건을 몽땅 털리기가 일쑤이고 자칫하면 목숨도 위험했다.
어느날 연길교구에서 제일 큰 본당인 「용정」본당을 맡고 있던 박골라도(독일인) 신부는 강건너 「대령동」본당 목(독일인) 신부 안(독일인) 신부 두분이 모두 장질부사로 돌아가고 말았다는 부고를 받고 슬픔에 잠겨 어찌할바를 모르다가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말을 타고 대령동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대령동본당에서는 백테오도로 주교를 비롯하여 교우들이 박골라도 신부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는데 날이 저물도록 보이지 않았다. 조말딩 회장은 강건너에 가서 사정을 살피고 있었다. 백주교는 강가에 마중나와 있었는데 그때 마침 강건너에서 총소리가 들렸으니 그것은 박골라도 신부를 총살하는 소리였음을 조회장에 의해서 알게 되었다.
박신부는 말을 타고 먼길을 와서 이제 강을 건너려고 할 때 검문소를 지나게 되었다. 검문소에서는 『말에서 내려오라!』고 소리쳤다. 이때 박신부는 말위에 앉은채
『나는 신부요』하면서 명함을 끄내어 보였는데 검문소에 있던 일본인들은 매우 건방지다고하면서 박신부를 말에서 잡아 끌어내렸다. 이때 통역하던 사람이 통역을 제대로 하지않고 나쁘게 했던 탓도 있겠지만 박신부는 검문소에서 심한 매를 맞고 한쪽 어깨가 떨어져 나갈 정도였다.
그들은 말을 다시 타라고 했지만 박신부는 말고삐를 잡을수도 없이 말위에 앉은채 흔들 흔들했다. 이때 일본인들은 박신부를 죽여버려야겠다는 생각에서 갑자기 비적이 쳐들어 온다고하면서 계엄령을 선포하고 강을 건너가려는 박신부를 그만 아무런 이유없이 총살하고 말았다. 이것을 어디까지나 비적들이 한짓이라고 연극을 꾸미기 위해서 시체를 끌어다가 칼끝으로 수십군데를 찔러서 상처를 내어 묻어버렸다.
조회장에 의해서 이 사실을 알게된 백주교는 너무도 노한나머지 일본대사관에 연락을 하고 또한 영사를 오게 했지만 조사한 결과 비적들의 행위로만 미루는 그들의 맷심이 당시의 혼란된 사회상으로 보아 자칫하면 더욱심한 교회박해로 번질 염려가 있다고 해서 교회당국에 보고하기도 꺼려했었다.
박골라도 신부는 몹시 지혜롭고 옳은 판단력을 가진분으로 앞날이 촉망되는 선교사였다. 백주교를 비롯한 만주에 있던 한국교우들은 박골라도 신부의 시체를 찾으려고 몹시 애썼으며 강변을 모두 살폈지만 찾아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조말딩 회장이 꿈을 꾸었는데 박신부의 시체가 검문소 가까운 모래사장에 파묻혀 있었다. 이상해서 가보니 바로 꿈에서 본 그자리에 박신부의 시체가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있었는데 얼굴은 조금도 괴로운 빛이 없이 평화로웠던 것을 볼수 있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조말딩 회장이 유일한 증인이 되는것을 일본인들이 두렵게 생각하여 조회장까지 죽이고 말았다. 주님의 사랑을 받는 종은 이 세상에서 예나 지금이나 가는길이 형극이었음을 다시 깨닫게 해준다. 오늘의 주님의 종들은 용기를 내어야 하겠다.(사진은 그후 용정본당 주임이던 현 왜관대수도원부원장 주골비니안 신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