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저렇게 일하지 않고 잘 입고 있읍니까?』 이곳은 요 멀마전에 서울에 온 메크린치 신부가 서울사람들을 보고 한 말이다. 그는 1928년에 「아일랜드」에서 태어나 51년에 사제서품, 53년 4월에 26세의 젊은나이로 이역만리(異域萬里) 한국에 왔다.
제주도에 「자활」의 길을 닦은 메크린치 신부는 54년 4월에 제주도 서단(西端) 한림(翰林)본당 신부로 부임하였으나 성당건물이 없어 남의 2층에 셋방으로 있었다. 임신부(메크린치 신부의 한국명)는 실업, 빈곤에 허덕이여 아무 희망도 없이 나날을 보내는 남쪽 섬나라의 고달픈 사람들에게서 가난과 실망을 물리치기 위하여 「4H클럽운동」을 시작하였다.
당초에는 이 4H「클럽」회원에게 종(鍾) 돼지 한마리씩을 나누어주고 기르게 한다음 새끼가 나면 새끼도 두마리를 갚고 나머지는 그들의 소유가 되는 것으로 정한 것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사업은 돼지뿐 아니고 닭 면양(綿羊)도 취급하는 가축은행(家畜銀行)이라는 색다른 은행을 57년 3월에 창설하고 59년에는 농가에 장려하여 생산된 양모(羊毛)의 가공을 직접 함으로써 보다 많은 이익을 차지하게 하기 위하여 애란수녀 5명을 초청, 「직조강습회」를 가졌고 한림수직사(翰林手織社)를 창설하게 되고…
250세대는 이미 개간사업을 마치고 매세대당 10정보씩으로 자립하고 이어 미국의 사료양곡을 얻게 되자 유휴지 5천정보의 개간사업을 시작 500세대의 개척농가를 입주시키게 되었다.
400정보의 중앙농장에는 돼지 8천두, 양5백마리, 칠면조는 시험적으로 30수, 닭같은 것은 집집마다 50-100수씩 있고… 농장건물은 78동에 총건평 5천3백여평, 2백 「다루」들이 「싸일레지」, 5만석들이 저수지(貯水池), 상수도 시설도 준공단계로 18㎞의 「파이프」를 구입완료하고 「트럭타」 5대 「트럭담뿌」 6대 등등을 구비했다.
처음으로 종돼지를 나누어 받은 「4H클럽」 회원들의 부형들이 몰지각하게 잡아먹기도 하여 5$밖에 회수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3배이상으로 농가수입은 늘었다. 60년 4월 휴가차 귀국하게 되었을 때에는 미국정부와 「PL480호 제2관」 사료계획을 교섭, 63년초에 승인을 받아 사료양곡(옥수수) 4만5백 「톤」을 63년부터 67년까지 5개년계획으로 받게끔 승인되고 이것을 다시 2년 연장하여 69년까지 7개년간 받게 되었다.
62년에는 독일주교회의가 이 사업을 돕기로 결정했고 뉴질랜드의 기아추방위원회(飢餓追放委員會)가 시초부터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앞으로 1천5백마리의 면양을 보내줄 것이라 하며 제주도가 면양목장으로 적합하다는 최종결정이 난다면 30만 내지 50만 마리의 면양 목축을 하여 해마다 1천만 「달라」 상당의 외화를 들여 양모를 수입하는 이 나라의 외화를 절약하여야 할 것이라고도 말했다.
현재로 개척농민과 인근농민들이 3개월간씩 교대로 개량농업기술을 교육받고 있는데 장차는 카나다나 그밖의 여러 서방국가에 있는 것과 같은 새로운 양식의 기술의 숙련과 지식을 얻는 농민대학을 만들 작정이라고 하며 급한대로 신용조합의 운영을 공부시키기 위해서 필립핀으로 협동조합의 양돈사업을 견학시키기 위하여 자유중국으로 각각 파견했으며 또 수시로 열리는 연구회에 참가시키기 위해서 서울로도 사람을 보낸다.
한편 지금 진행중인 개간사업이 어느 정도 진척되면 750세대는 완전히 재단법인 「이시돌」농촌개발협의회에서 독립시켜 자치적으로 협동조합을 운영하도록 하고 6세기 스페인의 「세빌랴」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부지런하게 세사람 몫의 일을 해냈던 덕 높은 이시돌 성인을 본받는 「이시돌」 재단은 다른 곳에까지 이 사업을 확장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 사업에 사재(私財) 전부를 바친 메크린치 신부는 60년에 휴가차 귀국할 때에도 다떨어진 옷차림으로 떠나려는 것을 뜻있는 분들이 양복 한벌을 마련하여 드렸더니 그옷을 입고 지난번에 있은 5 · 16 민족상 수상식에 참석하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