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알려지지 않은 교회사] 한국 최초의 신학생들
등잔불빛 아래서 짚신삼아신고 머리도 땋고
규칙 엄하고 학교는 배론·원주·서울로 옮겨
발행일1965-07-25 [제480호, 3면]
박해가 몹시 심했던 한국사회에서 신학교를 이상대로 쉽게 세울수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철종(哲宗)시대에 이르러 비교적 신앙의 자유가 있게되자 장주교(佛蘭西)는 1865년에 충청도 제천군 배론에 신학당을 세우게 되었다. 한문과 라띤어를 가르치면서 신학생들을 여기저기에서 모았다. 그러다가 원주 부흥골로 신학당은 이전하게 되었으며 다시 부흥골에서 서울 용산으로 옮겨 오게 되었다. 서울 용산에 있던 살림집 하나를 사서 신학교로 만들었다.
그후 다시 서울 혜화동으로 옮겨왔지만 올해 82세인 이기준 신부가 용산신학교에 다닐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줌으로 옛날 신학생들의 생활을 엿볼 수가 있었다. 이신부가 열여섯살때의 기억이라고 하는데 송신부(佛蘭西人)가 교장으로 일하다가 진신부(佛蘭西人)가 교장신부로 있을 때.
40명의 신학생들이 있었으며 신학생들의 생활은 한마디로 말해서 기계가 돌아가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는 것. 그때도 신학교의 규칙은 매우 엄해서 아무리 일찍 눈 떠도 종치기전에는 일어날수 없었고 세수는 15분 동안에 해야하는데 세숫대야를 들고가는 사람 오는 사람으로 아침이면 장광이었다고 한다.
아침미사가 끝나면 식사를 하는데 조반때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점심전에는 식당에서 모두 「구약성서」를 읽고 끝나면 「치명일기」를 읽었고 저녁전에는 종도들의 「서간경」을 보고 후에는 「준주성법」을 읽는것이 하나의 규칙이었다. 만과 끝에는 아무도 말할수 없었으며 모두 나무침대위에 눕게되는데 이신부는 나무침대에서 자다가 여러번 떨어져서 상급생들이 들어 올려 놓아주었지만 언제나 너무 곤히 잠들었던 탓으로 한번도 그것을 몰랐다고 한다.
신학교생활에서 가장 즐거운 날은 일주일이면 두번, 목요일과 일요일이었는데 목요일에는 교회의 소유지였던 동작동에 있는 집 하나를 정해놓고 신학교 식구가 모두 가서 미사 드리고 음식 만들어먹고 놀기도 하다가 돌아오는데 그때 신학생들의 모습은 바지저고리에 머리를 길게 땋아서 늘어뜨리고 있었기 때문에 외출할라치면 서로 서로 긴 머리를 땋아주어야 하는데 시간이 촉박해서 급해지면 머리를 땋던 학생들이 머리가락을 자꾸 뜯어 먹는 바람에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나오기도 했지만 외출한다는 기쁨에서 꾹 참았다는 이야기이다. 새남터에 나가서 「베이스·볼」을 하기도 하고 일요일이나 대첨례 때에는 용산에서 명동에 있는 종현성당까지 오는데 그 당시는 아주 길이 험해서 짚신을 신고 마른땅만 골라디뎌야 했다고 한다. 학교에서 짚신을 주지만 그것으로 부족한 신학생들은 자기 손으로 짚신을 삼아신어야 했다. 하루의 일이 끝나면 석유등불 하나를 가운데 놓고 죽 둘러 않아서 짚신틀도 없이 그냥 배에다차고 신을 삼았는데 고작해야 일주일을 넘기지 못했기 때문에 자주 삼아 신어야 하는 형편이었다. 짚신 바닥이 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바닥에 가죽을 대어서 신는 학생도 있어서 짚신 삼기와 긴 머리 땋기로 고생했던 옛날 신학생을 상상하게 해준다. 일년이 지났을때 학교에서는 신학생들에게 머리를 깎으라는 명령이 내렸다.
머리를 깎자 불란서에서 신학생들이 쓸 모자가 도착하였으니 이때에는 모자뿐만 아니라 의제까지 입고있던 바지저고리 대신에 교복으로 양복을 일제히 입게 되었다.
이렇게 큰 변화를 가져온 당시의 신학생들을 모두 나가면 신기하게 쳐다보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인천에서 처음으로 용산까지 기차가 들어왔는데 모두 야단이 나서 구경하였으며 자동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도 너무 신기해서 고함을 질렀다고 한다. 그때 전차도 물론 없었으며 사진기도 없을 때였으니 말할것도 없겠다. 이기준 신부는 안성 미리네가 고향인데 6형제중 둘째였다. 동리 서당에 다니다가 신학교에 들어간 것이다.
우리 한국신부로서 세번째인 강성참(姜聖參) 신부부터는 모두 잘 알고 있는 분들이 된다. 이신부는 신학교 제9회 졸업생인데 한국신부의 제열로 보면 21번째의 신부가 된다.
1913년에 신품을 받았다. 그러니 그때 얼마나 신부되기가 힘들었는지 알게 한다. 물론 지금도 힘들지만 시대의 변천에 따라서 신학생들의 생활에도 조금씩의 변화는 있기 마련이다. 교회의 희망인 신학교에 오늘도 계속해서 주님의 은총이 내려지기를 빌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