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차프린의 「나의 자서전」은 여섯번이나 고쳐쓴 그의 나이 75세에 발행된 일종의 고백전기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번역 출판된(「차프린 자서전」 신태양사 1964년 12월 발간 자서전의 반향은 실로 대단하여 어떤 비평가는 이를 디켄스와 고리끼에 비교했는가하면 처칠의 회상록에 비교한 사람도 있다 『찰스는 인간정신의 창조가 달성한 불멸의 인물이다 마치 프로데디우스, 돈팡, 돈끼호때 처럼』 이것은 좀 과장된 감이 없지않은 불란서판의 서평에 쓰여진 찬사다.
확실히 이 자서전은 그의 예술생활, 세번이나 파탄을 겪은 결혼생활, 그 자신의 감정을 적나나하게 고백함으로써 읽는이로 하여금 깊은 공감을 자아내게 한다. 어떤때 그는 눈이 휘둥그레지는 비평가들을 본적만척 『예술이란 말은 도대체 내 머리속에나 내 사전속에 있은적이 없다』하는가하면 『연극과 영화, 그건 단지 내 생활방편일뿐이지 그밖엔 아무것도 아니다, 내겐 항상 흥정하는 경향이 있었으니까』라고 느닷없이 말함으로써 소위 예술가라는 사람들을 어리둥절케하기도 했다. 비참과 사치의 극심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 빅토리아왕조시대에서 붓을 들어 「스타」와 억만장자의 나라 미국에서의 황금시대, 드디어 2차전쟁 후 「허리욷」의 쇠퇴와 더불어 차프린의 세계가 무대로부터 조용히 사라져가는 70년의 파란만장의 생애가 그려져 있다.
그중에도 가장 인상적인것은 디켄스와 고리끼적 색채를 띠고 있는 그의 슬픈 어린시절과 세계적 명성을 얻기까지의 가지가지의 「에피소드」일 것이다.
▲유년시대-차프린의 어린시절은 단지 「비참」 그 한 마디로 족하다. 굶주림과 거지행색 고아원생활, 그의 아버지는 「알콜」중독자로 아내를 버려, 어머니는 「런던」 교외인 「레민톤」 빈민가의 한지붕밑 방에서 미쳐버린다.
열한살난 차프린은 어머니를 데리고 정신병원에 가지않으면 안되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집에와 보니 텅빈 방안엔 찬바람이 일고 『탁자위엔 마시다둔 싸늘한 차한잔뿐 먹을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난로옆 「헨드·백」에는 열괴 몇개와 여러장의 전당포쪽지만이 들어있었다.』 이런 슬픔과 비참가운데 어린 차프린은 인정을 찾아도회의 잿빛 포도를 헤맨다. 마치 현대인의 고독한 영웅과도 같이.
6세부터 극장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여 지방극단 무대에서 관객의 휘파람, 날라오는 귤껍질을 맞아가며 그는 자라난다. 한편 꽃팔이, 인쇄공, 간호원 등 별의별짓을 다 해가며 겨우 굶주림을 명하기도 했다. 드디어 그는 후랫뜨·가루노의 희극단에 섞여 미국으로 건너갔다.
『「뉴욕」 이란도시는 그 마천루가 가리키고 있는 불손하고 모험에찬 도시이다』 그는 출세전 가난과 외로움에찬 그시절을 회상하고 있다.
▲그의 독창적인 「메이크·업」-희극영화제작자 마크·세넷드는 무대위의 차프린을 주목하게되어 그야말로 눈이 휘둥그레질한 계약을 자청해 왔다. 한주일 3회의 희극 출연으로 150「달라」, 운이 터진 모양인가. 세넷드가 말했다.
『뭐 특별히 극에 줄거리가 있는게 아니야. 무언가 「곧·아이디어」만 있으면 되지, 그 다음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상관할바 아니거던. 중요한것은 끝판에가서 겨관들이 잡으려고 뺑뺑이를 돌고 자동차가 바다가운데 「다이빙」을 하고, 뚱뚱이가 물통속에 거꾸로 쳐박히는 것을 일은 다되는 거지.』 차프린의 그 독특한 「스타일」과 분장은 바로 이때 생겨난 것이다. 『무엇인가 한가지 새로운 발견을 하지않으면 안돼. 무엇이든 좋으니까 아주 재미있는 「메이크·업」(얼굴화장)을 만들수는 없을까』 세넷드의 말에 그는 이런것을 생각했다. 『볼품없는 덜랭이 바지와 멍텅구리같이 커다란신을 신어보자. 그리고 「스틱」에다 중산모(中山帽)를 쓰고. 나는 어떤 것이든 대조적인것을 드러내고 싶었다. 금방이라도 허리츰에서부터 흘렁벗어져 내릴것 같은 느지렁한 바지에다 팽팽한 윗도리, 달랑머리위에 엊어놓은 작은 모자와 맹랑하게 큰 구두. 얼굴은 늙은이로할까? 젊은이로할까? 이때 세넷드가 내얼굴을보고 한창철이나는 꼴이라고하는 바람에 퍼뜩 한 생각이 스쳐갔다. 콧수염을 붙이자. 이렇게 하여 세넷드 앞에 나서자 나는 지팡이를 흔들거리며 무대위를 성큰성큼 걸어다녔다. 「어때요 이런모양은? 아주 다종다양한 인물이 될수 있겠지요. 방랑한자가 되는가하면 신사도 몽상가도 됩니다. 그래서 담배꽁초를 줍기도하고, 어린애 손에들린 눈깔사탕을 냉큼 뺏어다 입에 집어넣는것 쯤 꺼릴것 없지요. 적당한 동기가 마련되면야 뒤에서 여자의 엉덩이를 냅다 걷어차는 일도 사양치 않지요. 그거야 물론 바야흐로 일이 그쯤되었을때 한해서지만』 차프린하면 곧머리에 떠오르는 그 표표(飄飄)한 자태는 이렇게 해서 탄생했으며 그것은 삽시간에 영화가의 화제를 휩쓸어 버렸다. 그뿐인가 실은 권력과 부정에 도전하는 사나이, 언제나 덧없는 꿈을 쫓으면서도 이해와 인정속에 피어난 한인간의 진실이 그안에 상징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수백만인의 마음을 감동시켰고 이리하여 그의 양양한 앞길이 전개된다.
열차에서 극장에서 이르는 곳마다 쇄도하는 「팬」들로 경관이 동원되고 그의 동상조차 도처에 세워지는 판국이었다. 『세상 사람이 모두 돌았단 말인가? 나의 희극 두세가지로 이렇게 야단법석을 떨바에야 더 멋지고 굉장한 걸 만들어 내자』 쏟아지는 돈더미에 묻혀서도 과연 그는 망연자실함이 없이 초연한 지기를 잃지 않았다. 그 돈으로 그는 영화를 제작하여 독재자를 맹렬히 통박했고 그밖에 「석회등(石灰燈)」 「위목사(僞牧師)」 「황금광시대」 「가로등」 「모던타임」 등 우수한 작품을 내어 놓았다. 그의 걸작중 소년작키·구강과 공연한 「꼬마」(THE KID)는 모든 사람들에게 폭풍우 같은 감동을 몰아왔다. 「로스앤젤스」에서 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지자 맨 앞줄에 앉았던 아인슈타인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씻고 있었다. 영화 「가로등」은 3백만「달라」를 벌어들인데다 처칠의 주말초대, 간디와의 회견, 동경에서 특별열차를 내는 등 그에게 수많은 영예를 가져다주었다.
▲힛틀러의 비밀-세월은 흘러 어느덧 무성영화시대가 가고 「토기」시대로 옮아간다. 차프린의 왕년의 예술가, 시인으로서의 인기도 낡아진걸가. 그의 황금시대도 저물었다. 그무렵 힛틀러의 세력은 날로 증대되어 유대인 박해의 마수가 뻗쳤다. 차프린도 유대인이다. 그는 당장 촬영기를 들어 과대망상가의 생활을 손에넣고 떡주무르듯 한껏 비웃어준다. 「독재자」(1939)는 전세계의 영화관을 휩쓸었다. 힛틀러 자신사적인 회합에서 이것을 상영시켰다. 그런데 며칠후 문을 잠그고 힛틀러는 혼자 방에 들어앉아 이것을 다시 관람했으니 그는 「스크린」에 나타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무엇을 생각했을까?
▲「메카시」 선풍-전후 미국엔 무서운 「메카시」 선풍이 불어 닥쳤다.
차프린도 이 선풍에 휘말려 그는 국제공산당으로 몰렸다. 40년간 미국에 체류했으면서 그때까지도 시민권을 갖지 않았던것도 한가지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나는 「콤뮤니스트」가 아니다. 나는 일생 어떤 당이나 정치에도 등록한 일이 없다. 그렇다면 당신들이 나를 평화의 주조자(鑄造者)라고 불렀던것은 무엇때문인가?』 그는 극도의 협오를 지닌채 그의 아내와 지난날의 「유롭」으로 돌아왔다. 그를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의 내면에는 항상 어쩔수 없는 씁쓸한 「페시미즘」(염세즘)이 흐르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막시스트」로서의 피의 부르짖음이나 부자에 대한 가난뱅이의 분노라고 핏대를 세워 욕할 필요는 없다. 그는 허잘나위없는 작고 겸손한 인간들에 대해 진정한 「휴메니스트」이고 이것이 그의 인생의 지도체계인 것이지 특별히 계급투쟁을 벌인것은 아니다. 『그에게 「옵디미즘」(낙관주의)이 결여되어 있을지라도 인생의 비애를 고뇌하는 인간에 대한 관대한 마음, 약자와 선량한 인간의 승리를 위해 부정에 대항하여 감연히 일어서는 정열이었다. 그에겐 항상 선량함과 인간애와 어린이와 같은 담백함이 빛나고 있다』(소르미) 차프린은 그리스도교를 몰랐다해도 좋지만 그 「스틱」 중산모엔 「휴메니티」와 인간미가 넘쳐흘러 복음서에 가까운 그 무엇을 느끼게 하는 바가 있다. 【日本 「가톨릭生活」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