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종일 어두운 갱도에서 일하는 광부들에게 복음의 빛을 전해주고 그들을 사목하기 위해 18년간 광부들과 함께 생활해온 신부가 있다.
이태리 남쪽 시실리섬의 중앙부에 위치한 「칼타니세따」의 부콜레리 신부는 2년전 심장병으로 광산에서 물러날 때까지 「칼타니세따」에서 살고있는 광부들을 위해 모든 악조건들과 투쟁해 왔다.
그는 광부들이 사회주의자이건 공산주의자이건 또는 그리스도교적 민주주의자건 간에 그들의 사상을 가리지 않고 모든 광부들의 노동조건 향상과 노임인상(勞賃引上)을 위한 파업투쟁을 지도했으며 이때문에 동료 사제들로부터 공산주의자라고 규탄받은 바도 있다.
이제 갱도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된 「부」 신부는 역시 광부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위한 교육적 경제적 원조사업을 벌이고 있어 당지의 광부들은 누구나 그를 진정한 그들의 사제로 여기고 있다.
당년 47세인 「부」 신부는 1945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는데 그가 지금 일하고 있는 「칼타니세따」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으며 그의 부친은 여섯살 때부터 광석을 어깨에 메고 운반하는 직업으로 생계를 유지해왔기에 광부들의 가난은 바로 「부」 신부의 가난이었다.
「부」 신부의 노력으로 1946년에는 광부들의 하루 임금(賃金)이 75「센트」에 불과하던 것이 오늘날에는 5「달라로 인상되었으며 40년간 근무한 광부에겐 매월 13 「달라」의 연금을 지급하게 되었다.
이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부」 신부는 1953년 당지의 사제들과 광부 노동조합의 지지를 얻어 소위 「성스러운 파업」을 40일간 단행하고 파업기간중에는 광부촌을 돌아다니며 그들을 격려하고 양식을 공급하는 등 결사적인 노력을 경주했으며 이듬해에는 노임지불을 요구하면서 또다시 11일간 파업에 돌입햇는데 파업이 끝나자 파업광부 1천명중 1백20명이 이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부」 신부의 노력으로 석방되었다.
광부들은 1958년 「팔레르모」의 한 일간지를 통해 『그는 특수한 사제다. 그는 우리들의 사제다.
그는 불만 많은 광부 지도자들과 운명을 같이 하며 말과 행동으로 게으른 광부들을 분발시킨다』고 「부」 신부를 평가하면서 그를 찬양했고 또한 공산주의자인 광부들은 1954년 6월 12일자로 간행된 「팔레르모」의 잡지 「라 시실리아」에다 『갱도 속에서 비지땀을 흘리며 일하는 광부들은 불편부당(不偏不黨)하고 정열적인 태도로 매일같이 그의 사업에 진력하는 「부」 신부를 잘 알고 있다. 이곳에 있는 광부는 누구나 정치적 색채를 초월하여 「부」 신부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광부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말씀으로 광부들을 위로하기 때문이다.』하고 기술한 것을 보더라도 「부」 신부의 사랑과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부」 신부는 『어린 시절을 광산과 같은 시련이 많은 곳에서 자라난 사람은 광부가 공산주의자이건 민주주의자이건 그를 차별대우 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나는 항상 정치적인 문제는 외면해온 반면, 언제나 광부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제로서 행동햇으며 동시에 될 수 있는대로 그들과 어울리기를 노력했다』고 말했다. 【칼타니세따 · 伊太利 NC 特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