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라는 용어에 내포된 철학적 사상과 시간과 공간에 의하여 실현되는 역사적 형태를 구별해 보는 것도 타당할 것이다.
■ 共産主義와 社會主義 運動
칼 맑스의 사상이 역사적 변천 과정에 유입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마 볼세비키에 의한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일 것이다. 레닌 다음에 스탈린 시대는 칼 맑스의 사상이 벌써 환경의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였으며 후르시초프 시대는 그것을 재확인했다.
티토의 정치노선이나 중공의 정치노선은 공산주의의 사상적 문제만이 관심사가 아니라 정책화 하는 공산주의 운동도 주목할만한 일이라고 깨우쳐 주었다.
칼 맑스가 주장한 중공업과 경공업이 관계를 맹목적으로만 인정하지 않고 자본주의 경제이론을 따르듯이 1962년부터 논평하기 시작한 「리베르만」의 경우는 공산주의 경제체제의 역사적 동향을 보여주었다.
일반적으로 사회주의라고 불리우는 것들을 칼 맑스가 만들어낸 것은 물론 아니다. 그중에서 공산주의에 가까왔던 것만을 좀 보면 불란서 사회당(SFIO)이 1935년 7월 14일에 불란서 공산주의와 소위 「人民戰線」이라는 정치적 공동작전을 했으나, 1945년 8월에는 합동작전을 거절한 사실은 어떤 사상과는 구별된 정치운동의 방향을 보여주었다.
독일의 사회당(SPO)은 1959년 11월 「바드 고데스버스」의 의회에서 생산재의 사유제도를 인정함으로써 사회주의의 경제관의 변동을 보여주었다.
■ 敎會의 가르침
이렇게 주위환경의 영향을 받은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은 어떠한가? 즉 이러한 운동에 대한 태도는 어떠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벌써 비오 9세는 「실라부스」(1878 · 12 · 28) 「레룸 노바룸」 (1891 · 5 · 15)에서, 비오 11세는 「미세렌띠씨무스 레뎀똘」(1931 · 5 · 15) 「과드라제씨모안노」(1931 · 5 · 15) 「까리따떼 그리스띠」(1932 · 5 · 3) 「아체르바 아니미」(1932 · 9 · 29) 「딜랙띠시마 노비스」(1933 · 6 · 3) 「디비니 레뎀또리스」(1937 · 3 · 19)에서, 또 레오 12세는 검사성성의 율령(1949)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비판하여 오류로 처단하였다. 그러는 중에도 비오 11세는 특히 사회주의 경향의 역사적 변경을 지적하였었다.
이점에 있어서 요안 23세의 「어머니와 교사」(1961 · 5 · 15)는 『얼마전까지 사회에서 정의를 찾으려고 노력하던 사회운동, 정치운동들이 생산재의 사유제도를 명백히 반대했던 것이나, 오늘날에 와서는 사회의 실정을 더 잘 파악하고 그들의 입장을 재고하고 그 권리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바드 고드스버그」의 독일 사회주의 경향(1959 · 11)을 암시했다고 할 수 있다.
좀 더 나가서 「지상의 평화」(1963 · 4 · 11)는 『우주와 인간의 본질, 기원, 목적에 대한 철학자들의 학설에서부터 경제, 사회, 문화, 정치적 문제들과 관련되는 계획들을 구별하는 것이 옳으니 비록 이런 유의 계획들이 그들 학설에서부터 기원되고 아직도 거기에서 원리를 찾는다 하더라도 … 위에 말한 계획들은 변화하는 문제들의 조건들과 관련되므로 실제 이런 변화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우기 이러한 계획들 중에서 올바른 지성의 원칙들에 합치하고 인간의 정당한 욕망들을 채워주는 것이 있다면, 인정해줄 만한 좋은 점이 있다는 것을 누가 거부하겠는가?』고 하였다.
단순히 무엇이 변해서다 아니라 인정해줄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때로는 구체적 계획을 실현하는 경우에 이전에는 아무데도 유익하게 뵈지 않던 것들이 지금에 와서는 실제로 유익하고 장래에는 그러하리라고 전망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기회의 도달 여부를 판단 한다든지 또는 어떠한 양식들과 혹은 단계들을 통해서 경제, 사회, 문화 혹은 정치계의 참된 유익들을 공동으로 획득하여야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인간들의 개인 생활이나 사회생활을 다스리는 모든 덕 들을 조정하는 지혜까 가르쳐 줄 수 있다.』
이상에서 말한 것은 「가톨릭 신자」의 입장을 특별히 밝히지 않은 것이고 이제 그 점을 밝히면 『가톨릭 신자들이 문제를 취급하는 경우,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주로 사회단체나 또는 그러한 문제들의 분야에 있어서 가장 권위있는 사람들에게 속하며, 그러나 자연법의 원칙들을 지킬뿐 아니라 사회 문제들에 대한 교회의 교리에 순응하고, 교회 당국의 지시들에 복종하여야 한다.』
그러면 가톨릭교회가 아무 권리도 없이 비종교적 분야에 간섭하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 나온다. 그러나 이것은 간섭이 아니라 『아무도 교회의 권리와 의무를 소홀히 할 수 없으니, 이것은 신앙과 도덕의 교회를 보호하는데만 국한된 것이 아니며, 세속 문제들의 분야에 있어서 같은 교리를 실행하는데에 어떻게 응용할 것인가를 결정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자기 자녀들에게 권위있게 개입하여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러면 이상에 열거한 경제, 사회, 문화, 정치에 있어서의 가톨릭신자와 비가톨릭인간의 관계원칙을, 사회주의뿐 아니라 공산주의 운동에도 적용시킬 수 있느냐는 문제도 제기된다.
이에 대하여 요안 23세는 「지상의 평화」에서 명백하게 발언하지 않았다. 다만 확언할 수 있는 것은, 벌써 어떤 정책화된 공산주의 운동은 유고슬라비아나 중공과 같이 공산주의 사상에 불충실하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또 어떤 정당으로서의 공산주의 운동은, 불란서 내에 있어서와 같이 가톨릭신자들에게 제안했던 공산당의 소위 「제휴」(提携) LA MAINT ENDUE) (1936 · 4 · 17)라는 허울 좋은 정치적 합동 작전도 있었다. 만일 공산주의가 공산주의로서만 남아있다면 그안에 사상과 행동(운동)을 구별하기 어렵겠지마는 일정한 시기에 일정한 환경에서 인간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공산주의 운동이 주위환경에 의하여 다소 좌우되지 않았다는 보편화된 증거는 아직 없었으며 앞으로 좌우되지 않으리라는 보증도 없다.
또 여기에 첨가할 것은, 공산주의 운동의 역사적 어떤 변경과 순간적 정책간에는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마치 『한 학설의 원칙이 결정적으로 규정된 다음에는 더 변경될 수 없다』는 것과 같이 공산주의 철학은 계속될 수도 있다. 「지상의 평화」도 경제, 사회, 문화 혹은 정치계에 있어서 공동유익을 위한 문제 실현에 대해서 언급했을 뿐, 철학계는 명시되지 않았다. 또 이것은 사회주의를 상대로 한 것 같다.
공산주의도 그 원리와 그 원리의 실현 즉, 공산주의 경제, 사회, 문화, 정치는 구별하여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만일 어떤 구체화된 공산주의 경제, 사회, 문화, 정치가 역사적 변천과정을 밟아 왔기 때문에 교회에서 벌써 오류로 처단한 원칙이나 형태와는 구별되어, 인간이 『지성의 원칙에 합치하고 인간의 정당한 욕망을 채워주는』 단계에 도달할 수 있다면 이것까지도 단죄하라는 것은 물론 아니다.
오히려 공동유익을 위하여 일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경우에 있어서는 어떤 오류에 기원을 두었다는 자체나, 아직도 거기에서 원리를 찾는다는 자체는, 현 상태에 실현된 적극적 가치를 부인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얼마전 반공법 위반혐의에 의한 서민호씨의 구속이나 윤보선씨의 소환장 발부 등은 정치적 파문으로 변했다. 이것은 반공법이 주장하는 반공성과 동시에 남북한 통일문제와 관련되었었다.
반공성지의 의미는 이상에서 말한 것과 같다. 같은 원칙에서 추상적으로 보면 남북한 통일문제도 한반도에 있어서의 시기적 문제가 아닌가 생각될 수 있다.
다만 북한 공산주의 운동의 방향을 예측하기는 어렵다.
서독과 동독간에는 인사편지 왕래나 예수성탄 부활 성신강림절에 친척방문을 위하여 서독에서 동독에 갈 수 있다는 몇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노인은 동독에서 서독에 갈 수 있다 한다) 그러나 월남과 월맹간에는 지금 전쟁이 있는 셈이다. 여러 통일안 중에 드 골 대통령이 제안한 중립화안이 있었다고 할뿐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金春鎬(수원교구 尙書局長 신부. 사회학 신학 專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