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6 · 25를 맞을 때마다 북한에 부모형제를 남겨두고 월남한 나는 여러가지 회상되는 바가 많다. 8 · 15 해방을 맞은 다음 해 38선이 곧 없어질 것으로 믿고 가정을 남겨 놓은 해 월남했다.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오늘 남북통일의 전망은 캄캄하다. 북한에 남아있는 우리 가족은 월남한 반동분자의 가족이라 하여 더욱 심한 탄압을 받았을 것이며 또한 나의 부모는 이미 세상을 떠나셨을 것이다. 이렇게 되고 보니 참으로 마음아픈 일이며 그리고 또 나와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닐 것이다. 누가 이 애절한 소원을 풀어 줄 수 있겠는가 더욱이 북한에서 자유를 잃고 강제 노동으로 인간이하의 처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북한동포를 누가 구해줄 수 있겠는가. 전조련 최고 간부인 관귀성(關貴星)은 재일교포로서 북괴의 초청을 받아 펴양ㅇ을 시찰한 후 그 목격담을 『6·25 사변이 김일성의 독재체제를 반석위에 올려놓았고 천리마운동에 의한 전진의 강행 등 백성들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 평양 「호텔」의 4층 창가에서 그 참상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었는데 그 「호텔」의 바로 뒷쪽의 건축기초공사장에서 곡괭이를 들고 흙을 파 헤치는 몇명의 여자들의 복장은 낡은 치마 저고리에 맨발이었다』고 한다.
이와같이 북한괴뢰에서는 여자들도 중노동을 해야할뿐 아니라 고무신도 없는 것이다. 비단 고무신 뿐이겠는가 특히 일상 먹는 야채하나 볼 수 없는 상태로서 모든 일상생활용품이 부족한 것이다.
지난번 북한에서 밀봉교육을 받고 남파되었다가 북한에서 들은 이야기와 남한의 현실이 너무나 차이가 있어 자유를 택하여 자수한 바 있는 모 거물간첩은 북한의 현황을 말하기를 8·15 해방 이후 김일성 일당은 소위 5개년 계획이란 미명아래 국민에게 5년만 참으면 잘 살 수 있다고 기만하여 5년이 지나면 앞으로 5년 또 5년 이와같이 계속하여 20여년을 속여왔으나 생활이 조금도 향상되지 않고 강제 노동으로 지쳐서 영양실조로 뼈만 남았으며 온 국민이 김일성당을 불신임하게 되었다고 한다. 북한의 현실은 사실대로인 것이다.
이와 반면에, 일전 나의 과거이 일본인 은사였던 환강(丸岡) 선생(현 일본 동경고교 교장)을 만났을 때 선생은 교육시찰단의 일원으로 초청되어 각 분야를 시찰한 소감을 『한국의 각 분야를 보고 그 발전상에 놀랐고 국민의 자유롭게 활발한 모습은 희망에 차있으며 특히 온 국민이 반공에 투철하고 단결되어 있다는 점은 극히 부러운 일이다.』라고 하였다. 이런 면에서 볼 때에 일본은 한 직장안에 공산주의자가 있나 하면 사회주의자가 있고 우익 좌익 하여 단결이 안되고 시끄럽다는 것이다.
특히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북괴는 암흑세계다. 형식상 신교(信敎)의 자유가 있다고 하지만 그 실은 강력한 탄압으로 종교가 없다고 해도 가언이 아니다.
이와같은 탄압을 받으면서도 우리 가톨릭교우들은 꿋꿋이 생활하고 있다는 말을 나는 최근에 월남한 사람으로부터 들었다. 종교의 자유는 물론 모든 자유가 충분히 보장되는 곳에 살면서 우리는 그 고마움을 잊어버리고 있다.
북한의 우리 교우들이 얼마나 종교의 자유를 갈망하며 남한의 우리를 부러워하겠는가. 앞으로 우리는 처참한 환경에 처하여 신음하고 있는 북한동포를 생각하고 우리 온 민족의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하여 성모님께 빌자.
朴炳七(바오로 · 대령 · 해군현병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