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駐韓宣敎師(주한선교사)들의 소리]韓國敎會 (한국교회)에 對(대)한 나의 소감을 말한다면…
敎會(교회)에 忠實(충실)하나 形式主義的(형식주의적)인 信仰姿勢(신앙자세)
生活(생활)한 典禮參與(전례참여)·聖書的(성서적) 生活(생활)·隣人愛(인인애) 등으로 內的(내적)으로 刷新(쇄신)돼야
불과 2년 남짓한 사목경험으로써 한국교회에 대하여 무엇을 말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사실 나는 다른 나라교회에 대하여 아는바도 없으므로 무슨 비교를 해볼 수도 없다. 적어도 사제(司祭)로서 신앙생활을 연구해본 것은 한국 아닌 다른 아무데서도 경험한바 없었다.
따라서 내가 여기서 하는말은 사실 좀 허황한 생각일는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도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것은 신자들이 교회와 그 형식에 아주 익수해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장면(張勉) 박사가 얼마전 가톨릭시보에 투고한 교회변호론은(6월 13일字 474호 제4면) 퍽 흥미있는 것이었다. 이 논설에서 장박사는 오직 국외(局外) 인사들만이 가톨릭교회의 법규와 형식을 못마땅하게 여길 수 있는 것으로 말하였다. 하지만 나는 과연 모든 형식이 그렇게 깊은 뜻을 가진 것인지, 더 나아가 이뜻을 일반신자들이 이해하고 있는지 다소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같은 논지(論旨)는 여하튼 장박사를 그들의 가장 대표적인 「엘리트」라고도 말할 수 있는 한국가톨릭신자들이 교회에 대하여 얼마나 충실한지를 보여주고 있다. 신자들은 다만 일반적인 의미로 교회에 충실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그 형식과 전통을 사랑하며 이를 이해할려고 힘쓰고 그런 형식과 전통을 자랑으로 여긴다. 이는 분명히 교회에 대한 신앙과 신뢰를 증거하는 것이다. 신자들을 위해서는 교회는 위대한 지도자이며 그에게는 누구나 안심하고 자기를 의탁할 수 있다. 사실 그리스도교적 및 성서적 의미의 신앙은 순종과 거의같은 것이기 때문에 순종은 교회의 기본덕행의 하나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가톨릭교회 특히 평신자들의 자세는(적어도 외관상으로는) 좋게 보인다.
그러나 이같은 순종은 과연 언제나 정신적으로 깨우쳐진 순종인가? 그것은 인격적인 존재에 대하여서 보다 더 교회제도에 대한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교적 순종은 본질적으로 인격적인 존재에 대한 것이며 그것은 끝내는 예수그리스도라는 한 인격적 존재와 천주성부에 대한 것이다. 물론 예수그리스도도 친히 계명과 형식을 주었다. 뿐만아니라 어느 정도의 법규와 형식은 교회안에 언제나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인격적 관계가 본질적인 것임은 말할것도 없다.
최근에 한 부인 예비신자는 내게 말하기를 그녀는 누구집 연도에 참석한 일이 있는데 그녀가 보기에는 신자들은 마음은 딴데두고 그냥 입으로만 연도를 외워내려가는것 같더라고 하였다. 이것은 다만 한 국외자(局外者)의 인상에 불과한 것인가? 물론 분심잡념이란 기구중 아주 필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여기서 나타나는 것은 많은 신자들의 신앙자세(姿勢)가 왜곡(歪曲)돼 있다는 것이다. 환언하면 신자들은 어떤 기구를 형식적으로 외우고 울림으로, 어떤 계명을 형식적으로 지킴으로 천국에갈 자격을 얻는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내가 보는데는 많은 신자들의 성모경을 바치는데 취하는 정신자세는 소박한 불교도들이 「나무아비타불」을 외울때의 그것과 별 차이가 없는것 같다.
형식주의는 물론 교회가 그리스도의 생활한 몸인 한에있어 교회의 탓은 아니다.
그러나 교회는 또한 신자들의 단체이기도하기 때문에 교회에는 다분히 형식주의와 법률주의가 있다는것도 부인할 수 없다. 이것은 분명히 우리 신자들이 가진 가장 큰 약점의 하나이다.
한국신자들의 이간은 약점은 여러 세기(世紀) 동안 한국사회를 지배하여온 유교적 사회양식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인가? 나는 신유교제도(新儒敎制度) 즉 주자학(朱子學)이 그의 불변의 규율과 더불어 다른 어느 나라에서 보다 한국에 있어 엄격히 준수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한국의 가톨릭신자들이 그뜻은 크게 생각지않고 일정한 기구문을 형식적으로 배우고 일정한 예절을 행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혹시는 그와같은 전통에서 결과된것이 아닌가?
아마도 향후(向後) 수10년 동안 신부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신자들로하여 금구령이 한 체계적 계명과 형식에 대하여 맹목적으로 순종하는데 있지않고 오히려 생활하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부르심에 대한 사랑의 순종에 있다는 것을 확신케 하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이 주님의 부르심은 형식이나 제도 뒤에 보다 우리 이웃사람들의 곤궁(困窮)뒤에 더 감추어져 있다.
이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니요 제2차 「바티깐」 공의회를 통하여 쇄신된 교회와 함께 의식하는 것이다. 나는 신자들이 신부들을 따라 이같은 쇄신의 길을 가리라는 것을 확신한다. 특히 신자들 가운데 젊은 세대와 지성인들은 오직 그와같은 도표제시(道標提示)가 있기를 기다려마지 않는다.
또한 연로(年老)한 층도깊은 신앙과 순명의 정신으로써 지금까지도 흔히 이해하기 어려운 예규(禮規)를 겸손되이 지켜왔던 것과같이 이같은 교회의 지시를 역시 따르리라고 본다. 그렇게 될때에는 우리의 신앙생활의 중심은 두번 다시 기구의 암송(暗誦)이나 문답식(問答式)의 교리가 아닐 것이며 생활한 전례를 함께 거행하고 성경안의 천주의 말씀을 묵상하고 거기서 울어난 정신으로 이웃에 봉사하는데 있을 것이다.
晋도마스(성 베네딕도 修道會員 尙州 西門洞 主任神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