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인 제2차 「바티깐」 공의회가 막을 내린 후 교회내에서는 물론 일반사회에서까지 그 결실 과정에 대하여 막연하지만 기대하는 바가 크다. 우리나라에서도 공의회의 결과가 유명무실한 이론이나 형식에 그치지 않고 가장 성스럽고 가장 보람있는 효과를 주안에서 거양(擧揚)하기 위하여 신자들의 생활을 보다 적극적으로 보다 능동적으로 일대 쇄신을 기하기로 연구 노력하고 있다.
이는 특히 금번의 한국주교단 정기총회에서 일대 관심사가 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교회의 광명이 될 주교회의에 붙이는 성직자나 평신도의 제안을 볼 때 좀 성급한 판단일지는 모르나 어떤면에서는 공의회에서 발표된 헌장에 비하여 소극적인 감이 없지도 않다. 우리가 앞으로 하는 활동이 공의회 정신의 핵심을 잡지 않은 것이라면 공의회의 효과는 그야말로 유명무실한 것이 되고 말지 않겠는가? 여기서 우리는 본회의에서 주목한 가장 중요한 방법이 무엇이며 그 방법은 충분히 이해되고 실천에 옮겨져가고 있는가? 또한 이 주목된 방법이 공의회 헌장의 근본정신 내기 가장 큰 계명과 일치되고 있는가를 반성해 봐야할 것이다.
이번 공의회에서 강조된 대화는 그리스도를 세상에 증거하기 위함에 있다. 비단 성직자뿐 아니라 평신도들까지 그리스도를 사람들 사이에 내 모시는데 전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세상에 증거하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겠다. 혹은 육영사업을 통하여 혹은 가톨릭 「센타」를 설치하여 가지고, 혹은 여러가지 사물이나 문화재를 이용하고 「매스 메디아」를 통하여 하는 등등이 그것이다. 이렇게 하여 세상이 우리 말을 듣고 우리 행실을 봄으로써 그리스도를 알게 돼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증거인으로서 생활해야 하느냐가 중요 과제가 되는 것이다. 말로만 하는 증거로써 성과를 거둘 수 있는가? 결실을 가져올 수 있는 가장 요긴한 방법은 무엇이며 준비적인 필연이 조건은 여하한 것인가? 이에 대한 뚜렷한 해답이 공의회에서 선포된 헌장에 나타나 있다. 따라서 다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의 모색과 그 실천적 활동만이 남아있는 과제가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다음에 몇가지 소견을 피력하고자 한다.
첫째로 교회의 모든 활동은 천주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실패케 되므로 항상 천주께 의뢰하고 기구하며 7성사를 통한 끊임없는 신심생활이 전제조건이 되는 것이다. 둘째로 모든 활동에 있어 신자생활의 근저가 되는 향주삼덕(向主三德)과 기타 덕행이 요구되는 것이다.
올바른 신앙이 없이는 순수한 의향을 바랄 수 없어 보화를 땅에 쌓는 격이 되고 말아, 질투와 유감을 견디어 나가지 못할 것이다. 굳은 망덕이 없이는 어려운 곤경을 인내로이 극복하지 못하여 흔히 절망에 이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로 교회의 모든 활동과 사업이 생명인 애덕이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가톨릭 「센타」나 학교도 중요하고 「매스 메디아」나 여러가지 시설도 필요한 것이지만 이 모든 것이 애덕의 결과로써 이뤄져야 함이 더욱 긴요한 것이다. 이점에 대하여 금월중에 있을 주교회의에서 심각한 연구와 구체적인 실천방법이 결정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복음 성경에서 말하는 애덕은 이웃 사람 사랑까지 포함되어 있으니 이는 보이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서 보이지 않는 천주를 사랑한다 함은 거짓이기 때문이다.
마음과 입술로 뿐만 아니라 행실로써 실천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실제로 손을 펴기 전에는 우리 천주께 대한 사랑은 거짓이 될 것이다. 천주께 대한 사랑이 없이 사람 사랑이 있을 수 없듯이 사람 사랑이 없이 천주 사랑이 있을 수 없는 것이며, 이 애덕이 없이는 사람들과의 그리스도교적 대화는 불가능할 것이며 그리스도신자로서의 구실을 다했다고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성당안에서만 마음과 입술로 서로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웅얼거리고 그리고서 은혜를 받고, 좋은 결심을 했대서 『천주께 감사하나이다』하고 사랑의 미사에서 집으로 돌아와서 하는 일상생활에는 아무런 변동이 없이 일생을 건전없는 신앙생활 속에서 오히려 권태와 냉담속에서 몸부림 치는 그러다가 임종시나 가서 서둘러 주의 품을 찾는 따위의 근본__가 어디에 있는가?한마디로 말해서 모든 생활안에 애덕의 원천이 결핍되어 있는 까닭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진실된 애덕의 원천이 없이는 성당안의 모든 예절은 무형식이 될 것이며 그외에 세속생활은 실로 무미건조한 기계의 움직임과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역시 공의회도 『_람을 못거둘 것이며 허사가 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행실로 서로 사랑하는데서 그리스도의 형제임을 증명할 것이다. (요 13, 35)
그리스도의 뚜렷한 말씀 즉 우리는 서로 사랑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증명해야 한다 함은 공의회의 헌장에 인용되고 있다.
더구나 우리 사회에는 애덕의 실천을 목말라 기다리는 영세민이 눈만뜨면 보이고, 잠만 깨면 들리고 있다.
가난한 자가 복음을 받는 좋은 조건에 있다는 말씀으로 보다 우리는 첫째로 빈자들과 우선적으로 대화를 해야할 것이다.
이것이 또한 주의 정의의 실천이기도 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영세민들과 접근하여 그들의 요구를 살피고 그들과의 대화를 통하여 그들의 의향을 바르게 하며 그들 속으로 뚫고 들어가서 그들의 영육간의 생활에 희망과 밝은 의욕을 불어넣어 주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물론 의뢰심만을 길러내는 무조건의 원조가 필요하다는 말은 아니다. 자조 자립 정신을 기르며 신용있는 사회사업을 통하여 저들의 경제생활을 향상시키는데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영신생활뿐 아니라 현세의 생활에까지 그리스도의 정신을 주입시키는 대화를 가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만이 영세민을 적절히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방도가 될 것이다.
생활란으로 인하여 성당을 멀리하고 자녀들에게 종교교육을 등한시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
자기성화를 서두르고 타인에게까지 그리스도를 증거하자는데 공의회의 목적이 있다. 본회의 헌장에서 뚜렷하게 말하고 있는 가장 빛나는 그리스도의 증거(PRAECLARISSIMUM TESTIMONIUM)는 애덕의 싱싱한 실천(VIVIDA EXPFEDDIO CARITATIS)이요, 이것이 그리스도의 가장 큰 예명(MAXIMUM MANDARUM)인 것이다.
영세민들의 물질적인 생활의 향상에까지 애덕으로써 관심을 가지고 대해야 할 것이다. 공의회에서 강조되고 있는 빈민에 대한 애덕의 행실이 부국에만 한할 것일지니, 우리나라와 같이 가난한 환경에서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함은 큰 오해인 것이다. 그리고 교리공부나 출판사업에만 주력하고 외적 예전 쇄신 등만으로 만족하고, 빈자를 돕는 원선시오 사업이나, 신용조합 등을 무시한다면 가장 빛나는 증거 곧 사랑의 실천이 없는 까닭에 공의회에서 말하는 대화는 불가능할 것이다.
현재 우리의 사회는 훌륭한 이론이나 말을 기다리지 않는다. 정의와 사랑과 희생의 행실을 고대하고 있다. 사회의 심리를 정확히 파악하고 이에 맞는 대화를 해야만 할 것이다.
오컨대 차기 주교회의에서는 훌륭한 이론이나 외부적인 형식을 새롭게 하는데 그치지 말고 우리 사회에 뜨거운 사랑의 불로써 세상에 그리스도의 증거를 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을 연구하여 우리 사회에 진실된 대화가 이뤄져 공의회의 근본정신이 이땅에서 실현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나의 어린 자녀들아, 말로나 혀로써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실과 진리로 사랑할지어다』
(성 요왕 1서 3 · 18)
卞甲善(神學博士 忠南 唐進本堂 神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