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알려지지 않은 교회사] 尊屬(존속) 넷이 모두 殉敎(순교) 祈念聖堂(기념성당) 짓기가 所願(소원)…後孫(후손) 南相喆氏(남상철씨)
神童(신동)이라 알려진 南雨天(남우천) 翁(옹) 殉敎(순교) 이웃에 影響(영향)줘
발행일1965-08-08 [제482호, 4면]
예나 지금이나 제주가 뛰어나서 사회적으로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 영화에 쏠리지않고 오직 천주님만을 위해서 열심한 그 태도는 그대로 전교에 큰 도움이될 뿐만아니라 천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적극적인 길이 되기때문에 교회로서는 이들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여기 말하는 남우천 옹은 바로 현재 서울 명동지하실 무덤에 묻힌 복자될 분인 남종삼(요안)씨의 아버지며 지금 현존해있는 남상철(南相喆)=미아리 본당회장)씨의 증조부이다. 우천옹(아오스딩)은 어릴때부터 재주가 뛰어나서 일곱살 때 충주 백일장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지어서 일등상을 타게된 일이 있은 후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 83세에 이르러 순교하기까지 쉴새없이 세상 사람들의 화제의 중심인물이었음을 알게 한다.
▲構木爲巢
嚴霜九秋葉落棟
細雨三春花發椽
이글은 아주 유명한 것이어서 우천옹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다. 뛰어난 문장가이면서도 그 기지(機知)는 아무도 따를 사람이 없었다. 병인년 박해는 가장 가혹한 박해이어서 쉬었다가 다시 계속되고 또 쉬었다가 다시 계속되어 몇차례 있었는데 잠시 주춤하고 있을때 남종우(요안)인 아들이 대원군 치하에서 승지라는 벼슬을 하고 있을때의 일이다.
아라서(로서아의 구칭) 군함이 원산에 들어와 있었다. 정부에서는 혹시 폭격이라도 해오면 어쩌나 하는 불안에 떨고 있다가 꽤 한가지를 생각해 냈으니 그것은 국내에 있는 불란서 주교나 신부들의 힘을 빌려보아야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때 남종삼씨는 시골에 흩어져 있는 주교나 신부를 모았다.
허지만 대원군의 생각은 하루아침에 다시 변하고 말았으니 그것은 아라사군함이 물러갔다는 것과 중국에 파견되었던 사신들이 돌아와서 하는 보고에 자극된 것이었다. 중국에 가 보니 중국에서도 서양신부들 그리고 교우들을 모두 닥치는대로 죽입디다.
그전에도 서양주교를 우리가 죽였지만 아무일이 없었으니 이번기회에 모조리 죽이고 맙시다하는 결의문이 채택되었다는 사실을 남종삼씨가 알고 아버지인 우천옹에게 보고했을때 한참동안 침묵하다가 이윽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 네 생명은 천주님께 맡긴 것이니 심한 다짐을 받을때 성 교회를 욕되게하는 말이 없도록 조심하여라』하였다는 것이다. 사실 부친의 분부대로 남종삼씨는 훌륭히 치명해서 많은 치명자들 중에서도 간택 받았다.
우천옹도 제천군 감옥에 곧 갇혔다. 다시 공주감영의 감옥에 투옥되어 있다가 옥중치사 하였다.
우천옹의 순교는 그 당시 누구의 순교보다 많은 미신자들의 관심을 모았으며 크게 충격을 받아 입교하는 사람도 많았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것은 유명한 문장가일뿐만 아니라 신동이라고 불리운만큼 신비로움을 지니고 일을 처리해나갔으며 대대로 남씨 집안이 사람들의 선망과 존경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남회장은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당시 16세인 백부 또 연안 이씨이었던 할머니를 모두 잃었다. 당시 15세밖에 안되었던 남회장의 백부는 전주감형으로 보내졌다. 포졸들은 아직 어린것을 죽이기가 몹시 안되었던지 1년을 더 기다려 보기로 하였다. 그때에는 16세가 되어야 성인이 되었다고 했으며 성인의 표시로 호패를 채우고는 다시 다짐했다. 『이제 너마저 죽으면 네 남씨 집안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알지. 한마디만 천주를 믿지 않겠다고하면 될터인데 그말을 못할리가 어디 있느냐』했다. 허지만 16세의 어린 몸이기도 했지만 죽어도 천주를 배반할 수가 없으니 그리 알라고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용감하게 치명하였다. 할머니는 창영에서 치명했는데 그때 사람들은 남승지 부인이 낮에는 조선임금을 섬기고 밤에는 서양임금을 섬기기 때문에 가족들이 모두 귀양와서 죽는다고 했다고 한다. 이렇게 병인년 박해때 네 사람의 직계존속을 잃은 남회장은 지금도 유일한 소원은 그들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성당이라도 짓고 싶다고 하는데 모든것이 주님의 안배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으니 그저 주께 의지하고 매달려 보는 수밖에 없다고 순교자 집안의 후손답게 겸손되이 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