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駐韓宣敎師(주한선교사)들의 소리] 韓國敎會(한국교회)에 對(대)한 나의 소감을 말한다면…
韓國敎會(한국교회) 土着化(토착화)를 위해 外觀(외관)보다 內的(내적) 生命(생명) 充溢(충일)한 敎會(교회)되길
敎會美術(교회미술)·音樂(음악) 등에 邦人藝術家(방인예술가)들이 나서야
西洋式(서양식) 「외딩마치」·「할리우드」式(식) 盛裝(성장)엔 失色(실색)
내 책상머리에는 한국가톨릭교회에 대한 나의 인상과 신앙 및 교회생명활동을 촉진하기 위한 의견을 말해달라는 원고청탁서가 놓여있다. 말하자면 한국교회를 외국인의 눈 즉 국외자(局外者)의 눈으로써 본것을 말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이미 32년래 한국가톨릭교회한가운데 살고 있어 나와 같은 경우엔 차라리 독일교회를 어떻게 보는지 물었더라면 더 적합할 것 같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나는 최선을 다해 말해보겠다.
내가 받은 제일 큰 인상은 -다른 많은 이들과 같이- 한 위대한 시간이 한국교회위에 도래(到來)해 있다는 것이며 이나라 순교자들의 교회 근간(根幹), (6.25동란을 전후하여 있은) 우리시대의 순교자들의 피와 생명이 바쳐진 그 교회근간에서는 하나의 새가지가 힘차게 뻗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이자리에서 자주 표명되었고 구도자(求道者)의 쇄도(殺到), 평신도들 특히 학생들과 노동청년들의 참여와 활동의 증진, 사제 및 수도자 성소수가 만족할만큼 많고 또한 그것이 질적으로도 비교적 좋은 현상, 교리교수법 및 종교에 대한 이해와 지식전달 방법의 개선을 위한 노력, 나아가 전례개혁이 별큰지장 없이 쉽게 실시되고 있다는 것등, 듣는 그대로 다른 나라와 교회들이 우리를 부러워할 만한 많은 밝은 점이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나의 기쁨이며 이는 또한 위대한 일을 하시는 천주님에 함께 누릴 수 있는 우리 모두의 자랑이다.
그러나 자랑함으로써 일이 다된것은 아니다. 일체의 지상의 것은 오직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며 우리는 아직 달성하지 못한 앞날을 내다보아야할 것이다.
나는 스스로가 한국교회혁신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교회를 혁신하는 것은 공의회와 주교님들, 또한 본당신부님에게 안심하고 맡길 일이다.
그러나 우리 분도회수녀들은 이분들이 연구하고 노력하여 내놓은 방침에 따라 우리가 투입된 곳이면 어디서나 항상 혁신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의무임을 자각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어차피 건설적 비판을 해야할 것이기 때문에 허다한 가운데서 다만 두가지 작은것과 한가지 큰 소망을 털어놓을까 하다.
두가지 작은것은 교회미술과 교회음악에 관한 것이다.
한국교회가 한국적으로 토착화돼야한다면 그것은 본방인(本邦人) 예술가들이 이 나라 고유한 각인(刻印)을 이교회에 부여할 때이다. 물론 인류전체에 공통적인것, 근원적인 연관이 있는 것도 사실이며 그로인해서 위대한 예술가들의 어떤 작품은 시대와 인종의 차를 넘어 정서적인 인간이면 누구에게서나 그 자신은 체험을 반영시킨 것과 같이 인식되고 긍정되고 애호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단떼, 미캘안젤로, 베토벤 기타 많은 예술가들이 한국에서도 응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그와같이 한국의 대가(大家)가 문필과 그림과 음악으로써 다른 대륙(大陸)의 사람들의 마음을 정복하는 날도 올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것은 우리교회에 나오는 예술적으론 아직 순수한 소지(素地)를 가진 사람들을 -한국인 예술가들이 나와서 진지하고 신학적으로도 의문의 여지없을 뿐아니라 값진 작품 즉 경외(敬畏)와 종교적 체험을 전달하는 작품을 만들어 내기도전에(한국것도 포함한)- 세계도처에서 수입해온 값싸고 저속한 예술품으로써 망쳐서야 쓰겠는가 하는 것이다.
예술가들 앞에 펼쳐있는 활동분야가 얼마나 넓고 가치있는 것인가를 알기위해서는 우리는 다만(현재 유포(流布)되고 있는) 그 모든 그림, 상본, 동고상, 기타 신심행위의 대상물들과 신자들의 그것에 대한 원의를 관찰함만으로써도 족할 것이다.
말할것도 없이 예술의 한국화는 성모를 한복(韓服) 차림으로, 그리고 장면을 조금 한국식으로 만들었다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 보다더 그 예술은 신앙을 동양적이요, 민족고유의 정서로써 이해하는 그 깊이에서 부터 길러내야 하는 것이다.
이 사정은 음악에 있어서도 같다. 분명히 일련의 아름다운 노래들은 인류전체의 보화이다. 그러나 신자들이 민요같이 즐겨 부를 수 있고 배우는데도 힘안들며… 음정(音程), 「리듬」 등 한국적 음악감각에는 낯선 그런 것들을 강요하지않는 참으로 한국적인 성가는 언제즘이면 나올 것인가?
이왕 내디딘김에 한마디 덧붙이겠다.
결혼식하면 종교적 내용이라고는 전혀없는 그 유명한 와그너의 「웨딩·마치」없이는 도시 생각도 못해볼 판국이니 꼭 그래야만 되겠는가?…
또 신부(新婦)는 반드시 「할리우드」식(式)으로 차리고 나서야만할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어떤 신랑·신부이고 고대 한국차림을 할려고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기품있는 오랜전통의 한국적 경건(敬虔)과 그리스도교적 결혼에 대한 신적(神的) 사랑의 신비를 결합한 현대적 양식발견은 있어야할 일이 아니겠는가?
이같이 꼬집어 말할려면 일상사(日常事)에 있어 여러가지 예를 들수 있다. 여기서 부탁하고 싶은 것은 『한국사람들이여! 한국사람으로 있고 한국사람이 되어다오!』하는 것이다.
이제 끝으로 나의 큰 소망을 말하겠다. 이것은 내 스스로의 것이요, 내게 가장 직접적인 것이면서·동시에 한국교회와 신자각자의 소망이기도 하다.
교회는 지금 성장하고 있다. 성당이 세워지고 개중에는 아주 아름다운 것도 있다. 나아가 교구, 본당, 수도원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고 학교, 병원, 자선사업체 등이 성장해 가고 있다.
다 좋고 또한 필요한 일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도 그 만큼 성장하고 있는가. 혹은 우리는 이면(裏面)에는 이교적(異敎的) 정신을 그대로 숨겨두고 외관만을 화려하게 싸올려가고 있지 않는가? 도대체 신자들은 어떤 자세로써 그 주위환경에 대하고 있는가?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의 여러가지 태도에 대하여서도 『그런일은 외국인들도 하지않는가』고 말씀하시지 않겠는가?
지난해 나는 대구 가톨릭대학생회에서 주최한 일치운동회합에 참석한 일이 있다. 그때 「테마」는 『우리 민족에게 그리스도교를 주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當時題目 「크리스티아니티와 한국사회 발전」)었다. 그날 저녁 부산의 김안젤로 신부님은 가장 적절한 말씀을 하셨는데 그것은 대략 다음과 같은 뜻이었다.
『표교방법으로써 최선의 또한 오래도록 결실을 가져올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신자각자가 각각 자기위치에서 복음의 정신을 따라 결백한 생활을 영위하고 자신의 자리를 일체의 부정부패에 물들이지않게 하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반영하는 표양, 미신자들 가운데 세워진 표적되는 것이다.』
사실 이외에 다른 길은 없다. 교회의 전성기(全盛期)는 오직 그리스도교의 기본원리를 따라 삶으로써 사회 모든 분야에 침투해 들어가는 데 있다.
누구나 한국교회를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면 그에게 있어 이점에 대한 결함을 보는것 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이 없을 것이다. 또한 한국교회가 고양의 하자없는 정배(淨配)되기를 바라는 것 보다 더 불타는 원의가 없을 것이다.
물론 현세에 있어서는 우리는 이것을 완전히 달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한국가톨릭교회는 오직 이것을 성취시키는 그 정도로, 이 민족 장래의 창천(蒼天)에 빛나는 태양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각자에게 부여된 자리에서 맡은 분담을 다함으로 이바지해야 하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젤드루드·링크(大邱聖분도會 會員 獨逸人 수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