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알려지지 않은 교회사] 告解秘密(고해비밀) 기어이 듣겠다던 日(일) 警官(경관)
教會(교회) 彈壓(탄압) 相回顧(상회고)…日帝(일제)
公文發送(공문발송) 簡便(간편) 口實(구실)로 敎會一致(교회일치) 종용
발행일1965-08-15 [제483호, 4면]
지금으로부터 30년전에만 해도 가톨릭단체를 굉장한 비밀단체로 보는 것은 반드시 일본경관들에게만 국한된 일이 아니었고 일반 미신자들도 그렇게 보고있는 사람이 많았다는 것을 알게 한다.
올해 76세인 황정수(요셉) 신부는 1937년 일지사변이 있을 당시 일본경관들에게서 받은 은근한 교회탄압은 말할 수 없이 무서운 것이었다고 하는데 황신부는 그때 40세 가까와 오는, 한참 일할 나이었다. 충남 예산본당을 맡고 있을 때이다. 예산본당이외에도 30여개의 공소를 도맡아서 일해 나가야 할 어려운 천주님의 사업이었다.
허지만 이보다 더 어려운 것은 일본 경관들의 은근한 교회탄압이었다고 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잊지 못할 일 한가지를 들고 있었다. 그것은 당시 일본 경찰국에서는 가톨릭교회도 다른 교회와 합치도록 하라는 지시였다. 이유인즉 그렇게 하면 자기들이 수시로 내보내어야 하는 공문띄우기가 매우 편리하다는 것이다. 열교와 합친다고 해도 교회행사에는 조금도 구애를 받지않고 그대로 할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일이냐? 하면서 신부들을 설복시키려 다녔다.
황신부는 그들이 어디까지나 교회탄압을 위한 하나의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런데 충남 합덕 본당신부인 백(블란서인)신부의 보좌로 있던 김시몬 신부가 그만 일본경찰관들의 약은꾀에 걸려들어 그렇게 하겠다고 승낙을 했다. 종교자체에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점을 그들은 강조했기 때문에 무방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김시몬 신부는 서울에가서 다른 신부들과도 의논하기로 하였다. 서울 가던 중 김시몬 신부는 황신부에게 들려서 하룻밤을 유하고 떠났다. 그때 그들은 일일이 신부의 뒤를 미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다. 서울에 다녀온 김시몬 신부는 내가 잘모르고 당신들의 요구에 응했는데 절대로 그렇게 할 수는 없다고 분명히 말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니 경찰국에서는 황신부가 김시몬 신부를 선동해서 못하도록 하게 한다고 단정하고 황신부가 아주 맹랑한 사람이니 잘 감기해야 한다면서 각 경찰서에 모두 공문을 띄워서 공동 감시를 하게 하였다. 공소에 나갈때 마다 일일이 사복경관이 쫓아와서 감시하는가 하면 아무용건이 없으면서도 하루종일 신부댁을 찾아와서 이런말 저런말 하다가 가기도 하고 날이 갈수록 황신부는 질식할 지경에로 몰아넣었지만 모든 것을 천주님께 의탁하면서 참아 나갔다.
그런데 어느날이다. 공소의 교우들은 오랫만에 고해성사를 받으려고 줄을 길게지어 서있는데 일본경관이 또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따라와서 하는 말이 『신부는 사람들의 비밀을 듣고도 절대로 비밀을 누설시키지 않고 잘지킨다지요』
『그렇소! 절대로 비밀을 지키지요』
『그러면 됐어요. 나도 신부와 같이 절대로 비밀을 누설시키지 않고 잘 지킬테니 나도 그 고해를 듣게 해주시오』
황신부는 어이가 없어서 맥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것은 절대로 안되는 일이요.』하고 경관을 노려보았다. 경관도 황신부를 노려보면서 버티고 있는 것이 아닌가. 황신부는 교우들에게 고해성사를 주려던 것을 중지하고 말았다. 황신부의 태도가 매우 강경해지자 오랫동안의 침묵을 깨뜨리고 경관은 다시 말하기를 『그러면 내가 경찰국장에게 가서 의논하고 오리이다』하고 가버렸다고 한다.
가톨릭단체는 도무지 알기 힘든 비밀만을 지녔다고 보았기 때문에 일본경관들은 무척 싫어했으면 두고 두고 감시해 왔음이 확실하다.
이러한 감시속에서도 항상 용기를 잃지않고 주님의 거룩한 사업을 완수해온 오늘의 할아버지 신부. 공부가 다 끝났어도 나이가 차지않아서 신품성사를 못받고 기다려야 했던 시대이지만 일단 성직자가 된 이상에는 불쌍한 영혼 하나하나를 천주님 앞에 끌어들이기 위해 자신을 버리고 용감하게 앞을 향해서 달리기만 하던 그 기백이 백발에 아직 서려있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