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國籍(국적) 없는 小女(소녀) (109) 蘭草(난초)와 채송화 ⑩
발행일1965-08-15 [제483호, 4면]
다방 밖에 나오자 「미스터」배는 「택시」를 붙들었다. 나도 집으로 돌아가는 방향인지라 같이 탔다.
「미스터」배는 자기 친아버지가 졸도했다는데도 조금도 당황한기색이 없이 한가히 「드라이브」나 나선 사람같이 「쿳숀」에 허리를 비스듬이 기대고, 입을 모두어 장난삼아 담배연기를 직선으로 뿜어대고 있었다.
『걱정 안되셔요?』
나는 그의 표정이 너무도 태연하길래 물었다.
『늙은이는 가는게 당연하지.』
그는 짐짓 입가에 엷은 미소를 담고 말했다.
『…당신을 길러주신 친아버지신데, …그렇게 남의 일같이 말할 수 있을까요?』
문득 「미스터」배가 미워진 나는 그를 나무라듯이 말했다.
『부모가 자식을 키운 것은 자기의 의무를 한 것이지.』
그는 여전히 여유있는 태도로 말한다.
문든 나는 그의 부친이 가엾은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그만한 아버지가 있었다면, 아니, 그 보다 못한 아버지라도 좋았다. 친아버지가 있었다면 나는 그 아버지를 공경하고 싶었다. 있다는 그것만으로 만족하고 싶었다.
그는 차 안에서 잠시 휘파람으로 「맘보」곡을 불며 구두 끝으로 장단을 맞추기까지 한다.
나는 그의 예사로운 태도로 미루어 비록 그의 부친이 졸도했다고 하지만 대단치 않을걸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S동에서 나는 내려야 할 것인데, 그대로 그와 함께 그의 집으로 같이 갔다.
내실에 들어가니, 간호원을 거느린 두명의 의사가 와 있고, 아랫목에는 배사장이 잠자는 듯이 의식을 잃고 누워 있었다.
뇌일혈이었다. 그리고 매우 어려운 상태라는 의사의 말이었다.
배사장의 아내는 멍한 표정으로 베갯머리에 앉아서 남편의 얼굴을 지켜보고 있었다.
「미스터」배의 얼굴은 차안에 있을때와 별로 다를바가 없었다.
나 같으면 예의상 슬픈 표정을 지을 것인데 그는 그의 부친의 죽음으로 자기에게 돌아오는 유산에 대한 기쁨을 그 얼굴에서 조금도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이순간 나는 「미스터」배의 얼굴이 극히 동물적으로 보였다.
『…운명하셨읍니다.』
환자의 맥박을 짚고 있던 의사가 말했다.
멍하니 앉았던 그의 병든 부인의 입에서는 통곡이 튀어나왔다.
의사는 이내 모두 그 자리를 일어서서 돌아가 버렸다.
바로 몇시간전에, R「호텔」 식당에서 맥주를 마시던 고민의 얼굴이 선하게 떠오른다.
밖에 나와 온실을 보니, 고인이 새로 사다놓은 듯한 난초 한포기에 보라색 꽃이 피어 있었다. 그 난초 화분에 고인의 고독한 넋이 서리어있는 듯이 보였다.
『살다가 죽은 인생…』
나는 혼자 이런 감회에 잠겼다.
직접 신변에서 사람의 죽음을 느껴보기로는 처음이었다.
아들의 불실함을 나무라던 그 얼굴의 인상이 식기도 전에 차디찬 시체로 화한, 한사람의 살고 죽는 가혹한 시간의 판결을 본 듯했다. 「미스터」배에게는 인사도 않고 그집 넓은 정원을 지나 밖으로 나왔다.
며칠후 장례식이 끝나자, 「미스터」배는 전보다 희망에 찬 표정으로 사무실에 나타났다. 그 자신만은 마치 영원히 늙지않고, 죽지도 않는 특권이나 가진듯이 보였다.
(…그 아저씨도 우리같은 젊은 시절이 있었겠지?)
나는 고인의 과거를 내가 아는 범위에서 더듬어 보았다.
고아로 태어나 고아원과 빈촌에서 초라하게 자라던 그의 소년시절, 성년이 되어서는 안먹고 안입고 돈 모으기에만 악착같았던 그의 하루 하루! 그렇게 모은 돈이건만 그 자신은 별로 써보지도 못하고 결국 부자간에 불화를 일으키게한 액운밖에 되지않았던 것이다.
(죽은 이는 병아리고 그의 자식은 독수리)
나는 이런 비유를 하며 사장실 「박스」에 깊숙이 앉은 「미스터」배를 바라보았다.
『아버지 불쌍하셔요!』
나는 「미스터」배에 대한 미움을 담고 말했다.
『아냐, 아버지는 스스로 만족감속에 돌아 가신거야…』
「미스터」배는 싱긋이 웃으며 말을 잇는다.
『…열흘전 일기를 보니까 이런말이 쓰여 있지 않아. 「나는 내 인생에 있어서 나의 목적을 달했다. 부자가 되고싶어 애를 썼다. 그리고 드디어 상당한 부자가 되었다. 나는 내 의지를 관철하였으니, 내 인생에 후회는 없다」』
『그런말이 쓰여 있던가요?』
『음, …아버지는 가정을 희생하고 돈 모으기에만 정신이 팔렸던 사람이야…』
「미스터」배는 냉정하게 말했다.
『유서는 없으세요?』
『유서라는 것이 따로 없어, 그 일기가 유서나 다름없지…』
『유산은 어떻게 됐지요?』
『회사의 재산은 거의 모두 고아원에 기부해 버렸어, 나한테 온건 집과 싯가 백만원 가량되는 부동산 뿐이야…』
일변 불평을 머금으면서 좋아하는 기색이다.
『집도 값이 굉장히 나가겠죠?』
『집은 삼백오십만원은 받을거야…』
『그럼 육백오십만원이란 유산을 받으셨군요!』
『핫핫핫핫…』
그는 유쾌한 듯이 웃었다.
그후 그의 일거일동에는 활기와 오만이 깃들고 인생의 행복을 혼자 차지한 듯이 보였다.
한달쯤 지난 어느 일요일 「미스터」배네 집을 찾아 갔더니 추워진 날씨에 현관 양지쪽에 그의 어머니가 쪼그리고 앉아있었다.
혼자 눈물짓고 있었던 양 눈가가장자리가 젖어 있었다.
『어머니 왜 또 우세요. 아버지 하고는 일생동안 말도 않고 지내던 사이인데 슬퍼하실거 없지않아아요?』
「미스터」배는 나무라듯이 말한다.
『…그래도 떠날때는 무어라 말한마디라도 있을 줄 알았더니 그 말한마디도 없이 가신것이 원통하다. 나는 내가 먼저 죽을 줄 알았다. 딴 여자가 이집에 들어설까바 아착같이 죽지않으려고 발버둥을 쳤더니 너의 아버지가 먼저 가셨구나…』
전보다 바싹 야워진 병든 부인은 아들에게 들으라는 것보다 죽은 남편에게 호소하듯 중얼거렸다.
『…너희들은 결혼하거든 아기자기 재미있게 살아야 한다. 그저 돈이란 많아도 소용없고 밥굶지 않으면 된다!』
병든 부인은 자기가 이루지 못한 행복을 우리에게 바란다.
「미스터」배는 내손을 붙들며
『우린 행복하게 지낼 수 있어요.』하는 눈초리로 나를 돌아보았다.
나도 그의 손을 뿌리치지 않고 그럴사한 얼굴로 있었다.
그에 대한 미움, 경멸감, 반발심, 이런 것들이 내 몸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아니, 남아있더라도 그가 상속받은 육백오십만원이란 돈의 빛깔은 그것들을 덮고도 남았다.
그의 아버지가 이를 악물고 쫓던 그 돈은 확실히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는 막장을 지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