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공의회의 결의문을 읽어보면 『오늘의 인류』 『현대세계내의 교회』란 말들이 커다란 제목에 보이며 막대한 부피의 문서로 「현대」에 대한 문제를 다루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읍니다. 현대는 다른 시대와 수별되는 엄연한 성격과 차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석기시대와 오늘을 비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중세기와 또 다른 시대와 큰 구별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철학사적 견지에서 말해보면 이것은 일찍 문예부흥시대부터 새 시대의 성격이 움트기 시작했읍니다. 중세기의 진부한 철학사상을 떠나서 새것을 찾자는 의욕이 강하였읍니다. 그리고 중세기에 생긴 많은 규율과 법명에 대한 반항을 계속하고 자유를 위한 혈투를 계속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상이 신중심주의(神中心主義)로 바뀐 것을 큰 특징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 그리고 실험과 경험으로 발달하는 자연과학은 놀라운 진보와 더불어 우리생활을 아주 바꾸어 놓았읍니다. 과학하면 자연과학을 가르킬 만큼 정신 과학은 명색이 없게 되었읍니다.
사상적으로 복잡하고 혼란을 보이는 세상에 우리가 사는 생활까지 옛날과는 아주 달라졌읍니다. 우리는 마실 물을 우물에서 긷지 않고 「펌프」로 올린 물을 수도꼭지 하나로 얻게되었읍니다. 밤에 등잔불을 켜지않고 「스윗치」하나로 대낮과 같이 밝게 할 수 있읍니다.
「텔레비」와 전화로 구경하고 대담할 수 있게 되었읍니다. 프링스 추기경의 표현을 빌리면 『기술이라는 도구의 매개로써 자연과 교섭을 가지게』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천주의 작품인 자연과는 직접 대할 기회가 줄고 인간 자신이 만든 도구와 방법을 통해서만 살고 있는 것입니다. 물방아와 계수나무 있는 달은 시(詩)의 제목이나 되었지 실생활과 관계없이 되었읍니다. 많은 신비는 면사포를 벗고 인공위성은 우주를 돌고 있읍니다. 그런데 자연과 만난다는 것은 종교적 체험의 중요한 출발점이었다는 것도 프링스 추기경이 말씀입니다. 성경에서도 똑똑히 로마서 1장 20절에 『천주의 불가시성(不可視性)은 즉 영원한 힘과 신성(神性)은 세계 창조이래 피조물로 뵈여 깨닫게 되느니라』고 말씀하셨읍니다.
근대 무신론이 처음 공장 노동자의 기술적환경(技術的環境)에서 전파되었다는 것은 이유가 한가지만 아니지만 자연을 떠났다는 것이 크고 중대한 근거가 됩니다. 『사람은 그 시대의 아들』이라는 격언이 있읍니다. 철학사상으로 보나 생활양식으로 보나 무신론으로의 유인을 받는 시대며 무신론적 영향을 받는 시대입니다. 인류의 태반이 신을 부정하는 공산세계에 살고 또 많은 사람들이 통계를 작성할 때 어떤 종교에 얹힌 것 뿐입니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이 여러 종교에 신앙을 보존하고 있읍니다. 이런 시대에 어찌 저 모든 백성이 천주를 중심으로 살고 모든 생활이 종교를 토대로 했던 중세기에서와 같이 루터의 종교개혁이 크게 보일 수 있겠읍니까? 종교전쟁, 종파 싸움은 한쪽 귀퉁이에서 일어나는 주목을 끌 수도 없는 적은 사건이며 조소거리가 될때가 많읍니다. 어린 의미에서 무신론에 대한 헌장과 무신세계와의 대화를 다룬 제2차 「바티깐」 공의회는 확실히 현대적이 아닐 수 없읍니다. 그래서 『인간의 존엄성』 『인간사회』 『현대생활의 가치』 등을 선언한 것입니다.
신학적 고차적(高次的)인 문제가 아니고 철학적 사회학적 즉 계시로서가 아니더라도 다룰 수 있는 문제가 논의되었던 것은 현대적 특징을 보인 것입니다. 과거의 공의회는 타종교와 타교파간의 오류를 지적 혹은 파문을 선언했읍니다. 그리고 교파가 다르면 서로 종교없는 외교인보다도 멀고 원수처럼 생각했었읍니다. 『하느님』과 『천주』는 마치 두 다른 어른인 것처럼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다른말을 썼읍니다.
이번에는 교회가 만방만대(萬邦萬代)를 위해서 있는 것임을 천하에 천명했읍니다. 그리스도교회는 본질상 영원한 교회입니다. 따라서 진리의 절대성을 부르짖는 교회는 변할 수 없읍니다. 그러면 어떻게 현대교회니 중세기에 맞는 교회니 말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이 문제는 다른 신부님들이 벌써 말씀하셨으므로 간단한 비유를 들어 볼까합니다.
『나』(自我)는 어렸을 때나 커서 장년기거나 늙어서 백발이 되었거나 똑같은 동일한 『나』입니다. 물론 많이 달라졌읍니다. 여러 환경과 시간을 뚫고 살아온 나는 달라졌지만 바로 동일한 나입니다. 이같은 『나』지마는 어릴때 입던 옷을 지금 입을 수는 없읍니다. 지금 『나』 와 맞는 옷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중세기의 옷을 현대 교회가 입을 수 있겠읍니까? 현대의 감각을 무시하고 낡은 예전과 옛날 표현으로 청중과 관중에게 교회의 뜻을 표현할 수 있겠읍니까? 그리스도교회는 생활제입니다. 죽은 목적과 같이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있을 수 없읍니다. 교회는 자라고 있읍니다. 그러나 다른것으로 변해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에 사는 교회는 현대의 과제를 더 찾았읍니다. 늘어만 가는 무신론자들을 그냥 버릴 수도 없는 것이었읍니다.
공의회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무신론에 대한 허두를 띠었읍니다. 『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인간을 하느님과 결합시키는 이 친밀하고 생활한 관계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으며 혹은 이를 노골적으로 거부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무신론이 가장 중대한 문제중에 하나로 대두하기까지에 이르렀으며 그래서 이 문제는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라고 하였읍니다.
공의회는 인간의 목적과 존재의 근원이 되시는 천주를 부정하는 무신론은 인간성을 파멸하고 인간의 지위를 비참하게 만든다는 것을 결론지었읍니다. 그러면서도 교회는 사랑으로 그들을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교회는 동시에 무신론자들의 정신안에 숨어있는 신(神)을 부정하는 이유를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바이며 무신론이 야기시킨 문제의 중대성을 깊이 인식하고 또한 모든 인간에게 대한 사랑에 동하여 무신론의 이같은 동기들을 진지하게 또한 깊이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바이다.』라고 말하였읍니다.
林和吉(가톨릭대학 부학장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