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은 우리 겨레의 수선탁덕(首先鐸德)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지 120주년이 되는 기념스러운 해다. 그가 1845년 8월에 중국 「샹하이」(上海) 근처의 「김가항」에서 서품 받은 후, 채 1주년을 맞이하지 못한 1846년 7월 26일 불과 26세의 젊은 나이로 「새남터」에서 천국에의 길이 활짝 열렸음을 확신하며 후려치는 형리의 칼날 아래 고귀한 일생을 마쳤던 것이다. 그는 서품 받은지 불과 1년도 못되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수선탁적으로 우리 교회에 남긴 공적은 크다. 그가 열다섯의 어린 나이로 고국을 떠나 이역만리땅인 「마카오」에서 면학하기 시작한 이후로 십년간에 걸쳐 조국 교회를 위하여 올린 부단의 기구와 노력을 불멸의 금자탑을 이루고 있으며 또한 순교 후에 그의 순교정신은 우리 교인들의 귀감으로 길이 후세에 현양되고 있어 우리 교회에 미치는 바 영신상의 영양은 이 교회와 더불어 길이 후세에 전하리라.
김대건 신부의 서품과 활동은 우리 교회자립의 첫 출발을 지었으며 이점에서 우리 겨레는 민족적 긍지를 느껴야 할 것이다.
가톨릭의 전교활동을 위임맡은 전교단체는 그 지역에서의 교세 확장에 따라 본방인(本邦人) 성직자를 양성하여 외부의 원조가 필요치 않을 정도로 교회가 발전하면 방인 자치 교회로의 길을 열어주고 있다. 즉 방인 성직자들의 교구 사목권을 인정하여 보다 활발한 구령사업을 전개하도록 이끌어주는 것이다.
이러한 자립교회로의 발전은 교세의 확장과 많은 방인 성직자의 나타남과 그들의 뛰어난 능력이 인정됨으로써만 가능한 것이었다. 자립교회란 방인 주교의 교구, 사목권이 교황청에서 윤허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며 방인 주교의 성성이란 많은 방인 성직자의 존재와 활동이 있음으로써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자립교회로의 첫출발은 방인 성직자의 출현에 있는 것이며 김대건 신부는 우리의 수선탁덕으로 바로 이 출발을 이루어 놓은 분인 것이다.
김대건 신부는 우리 민족이 최초로 배출한 성직자일뿐만 아니라, 뛰어난 재조와 담력, 부동이 신념과 활동으로 당시 우리 교회의 사목권을 맡고 있던 빠리외방전교회 책임자인 조선교구 주교의 두터운 신뢰를 받었으며 칭송과 존경을 받음으로써 이 나라 장차 성직자들의 능력을 보장하였던 것이다.
김대건 신부의 서품과 활약은 교회사적인 면에서 교회 자립의 첫 출발이 되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민족의 선각자로서 높이 추앙될 인물이기에 그의 업적은 심지어 국민학교 교과서에까지 대서특빌되고 있는 것이다.
김대건 신부는 서양학술을 위한 최초의 유학생이었으며 「마카오」와 「마니라」를 전전하면서 전후 5년간 면학에 힘쓴 보람 있어 한국인 최초의 성직자의 영광을 차지하였음은 물론,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최초로 양학(洋學)과 양어(洋語)의 체득자가 되었으며 성야 사정에 정통한 최최의 인물이 되었다. 이 점 문화사적인 면에서 김대건 신부의 지휘가 또한 강조되어야 한다.
유 · 불 문화(儒·佛 文化)의 섭취를 위하여 신변의 위협을 무릅쓰고 유학차 해외로 떠나간 사람들은 삼국시대 이후로 많았다. 특히 통일신라 때는 활발하였고 그 후에도 수의 다과와 유학 상대국의 변화는 있었으나 진취적 인사들의 해외 진출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서양 학술을 위한 유학의 길은 김대건, 최영압 등 세 소년의 「마카오」 파견이 그 시초였다. 물론 그들 보다 앞서 현종 때에 유명한 실학운동(實學運動)의 선구자의 한 분인 김육(金육)이 발달한 서양역법(西洋曆法)의 학습을 위하여 일관(日官) 송일룡(宋日龍)을 청국으로 파견한 바 있었으며 1606년에는 이탈리아 수사 칼르렛티(FRANCISCO CARLETTI)의 구출을 받은 안토니오 코레아라는 한국 청년이 이탈리아로 건너간 바 있었다.
그러나 송일룡이 경우, 직접 서양인들의 훈도를 받지 못하였으며 한낱 기술자로 역법을 익히고 귀국하는데 끝났고 안토니오 코레아는 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간 납치인으로 구출을 받아 이탈리아에 건너가 그곳에서 일생을 마친 사람으로서 한국인으로서 최초로로 서양을 방문한 사람이란 명예를 누릴지언정 한국 자체에 기여한 바 전혀 없었다.
김대건 일행의 유학 목적은 성직자 되기에 필요한 수업에 있었으나 그들의 학업은 단지 신학과 철학에 한한 것이 아니요 어학(羅典語 佛語 中國語)의 학습과 그밖에 보고듣는 전부가 곧 학습내용이었다.
그들은 서양인 성직자들과 같이 생활하며 정식의 조직과 제도를 갖춘 근대적 학교에서 면학한 것이니 그들의 생활 경험 전체가 서양 문화의 내용 바로 그것이었다. 이렇게 생각할 때 그들이야말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학술을 위한 정규 유학생이었다. 더우기 김대건 신부 이후로 서양 학술을 위해 유학생의 해외파견이 개국 이후인 1881년에 영선사(領選使) 김윤식(金允植)이 서양식 기계기술을 습득키 위하여 60여명의 청소년을 이끌고 청국으로 건너갔음을 상기할 때 더욱 감명이 깊어진다.
김대건 신부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 언에 체득자였음은 극동전역을 무대로 한 그의 눈부신 활동을 가능케 한 바탕이었으며 또한 문화사적으로 주목할만한 일이다. 그가 라띤어는 물론 중국어 불어에 능통하였기에 성직자로서의 성무를 집행할 수 있었음은 물론 중국 천지에서 중국인을 상대로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고 「샹하이」에 건너갔을 때 영국 군인 · 영국 외교관 및 프랑스인을 상대로 성직자 영입의 중책을 다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어학능력에 능통하고 서양 사정에 정통하였음은 교회 당국자나 또는 그와 접촉이 있었던 외국인들의 기록을 통하여서도 실증이 되는 일이거니와 1846년 성직자 영입의 새 항로를 개척하고자 황해도 해역에 나갔다가 불행히도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갖은 고초를 겪을 때에 그가 서양 사정에 밝고 성양 각국어에 능통하며 아울러 서양 학술에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음에 감탄한 박해당국자인 관료들 가운데 그의 재능과 학식 그리고 고매한 인품에 깊은 감명을 느껴 그의 구명(救命)을 생각하기에 이르렀던 사정을 생각할 때 그분이 차지하는 문화적 의의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李元淳(漢陽大 史學科 主任敎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