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 가톨릭은 7월중 포교지방을 위한 「기도의향」에서 가시아지역의 「매스콤」활용을 기도하고 있다.
가톨릭 「매스콤」의 사명은 지극히 절실하다. 敎會(교회)와 世俗(세속)과의 對話(대화)가 곧 「매스콤」의 「챠넬」을 타고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에서의 그것은 더구나 절실하게 요구된다.
우리는 아직도 「개척(傳敎)하는 敎會」의 입장에 있으며, 그 작업이 完熟期에 접어들지는 않았다. 교회의 개척정신은 우리의 끝없는 의무감이며 사명감이긴 하지만, 한국의 형편은 그것을 위한 整地마저 튼튼히 성취하지 못한 느낌이 없지 않다.
敎勢는 확장하고, 交會는 날로 늘어가도, 그것이 곧 信仰의 生活化는 뜻하지 않는다. 사회전통의 문제이며, 교회의 현실적 능력의 문제이며, 또한 敎會行政家들의 力量문제이기도 하다.
아뭏든 우리도 오늘의 한반도에서 가톨릭의 後光을 謳歌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 그럴수록 敎會는 說得力이 있어야 하고, 또 그것은 곧 眞理의 행사를 의미한다.
그러나 가톨릭은 이른자 「매스콤」의 전통마저 세우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일부의 聖職者들은 그런 일에 冷淡한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별로 절실해 하지도 않는다. 극히 「메스콤」의 原初的인 형태이긴 하지만 敎會 안에서의 日常的 「코뮤니케이션」마저 윤활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을 우리는 때때로 경험한다. 日曜日 미사가 끝난 敎會의 庭園에는 司祭와의 유쾌한 談笑가 없다. 교회는 미사를 참례하는 곳이지 生活의 領城속에 있는 日常의 장소는 아닌 것이라는 풍조는 어색하기 이를데 없다.
敎會의 問은 적어도 都心地에선 굳게 잠겨있고 聖職者는 교우와 疎遠한 관계에 있다. 家庭방문을 하는 성직자의 逸話가 오히려 희한할 정도이다. 한낱 「週報」라는 형식의 인쇄물이 配布되기 시작한 것도 오랜 일은 아니다. 週報의 형식과 내용은 論外로 치고라도 그런 일이 전국의 몇몇 교회에서나 이루어지고 있는지 궁금하다. 단순히 교회의 재정적인 실정이라고 치부할 일은 아니다.
밖으로는 가톨릭을 순수한 도익로 代辨할 「매스콤」의 기구가 몇이나 되는지 나는 궁금하다. 교회의 힘으로 운영하는 「매스콤」의 영향력이 얼마마한 규모인지 또한 궁금하다. 교회는 그와같은 일을 어느 정도로 절실하게 여기고 있는지 사실 나는 궁금하다. 근래에 있었던 一連의 事件들은 그런 懷疑를 더욱 깊게 한다.
교회가 사회문화의 전통적인 위치로 君臨해 있는 歷史的 배경과 국가라면 「매스콤」의 문제가 전연 다른 視点과 次元에서 論議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사회 · 문화 현실은 오히려 그 반대의 입장에 있다. 그때문에 가톨릭 「매스콤」은 교회의 절실한 관심이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의 환경도 제대로 가지고 있지 못하다. 교회문화적인 환경도 환경이지만, 그보다 集團的 成員 관계에 의한 환경도 어설픈 형편이다. 敎會文化의 創造가 그런 환경에서 어떻게 이루어질가에 관한 문제는 깊은 反省을 필요로 한다. 文化없는 교회는 規範없는 사회와 다를 바 없다.
오늘의 교회는 大衆앞에 있지도 않고 그들의 이웃에 있지도 않다. 바로 우리 안에 그는 있다. 祭臺는 앞으로 다가서고 司祭는 敎友와 對話한다. 미사를 「함께」 올리는 典禮는 참으로 많은 개혁을 단행했다. 公議會는 異端者들 「갈라진 兄弟」로 포옹하고 힜다.
가톨릭은 세계의 지붕을 건설하고 있다. 대담한 개혁과 說得이 날로 「바티깐」에서 宣布되고 있다. 한때 교회안에만 局限되는 것 같았던 敎皇의 지위와 권능은 그 영역을 벗어나 세계 문제에까지 확대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이런때일수록 「매스콤」의 개발을ㅇ ㅟ해 진지한 연구와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敎會의 모든 出版物은 一元化된 기획과 機構를 통해 刊行되어야 할 것이며 敎友는 그와같은 사업에 협조하는 것이 正道이다.
같은 「공과」의 경우를 보아도 敎區마다 다르며 또 그 채택도 성당마다 다르다. 서울에서 「明洞」과 「世宗路」聖堂에서의 기구문이 다른 것은 또한 무슨 亂脈인지 모르겠다. 敎會書籍은 적어도 經文의 경우만이라도 기필코 一元化된 기획과 그 실행을 위한 機構가 성립되어야 하겠다.
해마다 교회서적 보급운동이 전개되곤 하지만 실적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의문이다. 결함은 교우들의 무성의로만 돌리기엔 너무 根本的이다. 著述家들의 부족한 說得力을 외면할 수는 없다. 나는 이따금 교회의 정기간행물에 접할 때마다 도무지 文章의 구조마저 되지 못한 글을 발견한다. 어떻게 된 일인지 한심하기 짝이 없다.
가톨릭 言論人들도 많으련만 그들 사이의 意思疏通을 위한 기회마저 별로 없었던 사실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바티깐」 發 外信에 나오는 敎會典禮의 용어는 新聞마다 각양이다. 이만할 일을 해결하는 노력조차 누구나 외면한다. 나는 이 기회에 가톨릭 言論人들의 유기적인 「서클」을 제창한다. 日本의 上智大學은 벌써 그와같은 기구를 창설해서 이상적인 운영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敎會의 機構도 또한 보다 開放 되어야 한다. 그것으 많은 지혜의 集團化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지금과 같은 半閉鎖的인 體制는 敎會와 敎友의 疎遠을 조장하는데 도움이 될 뿐이다.
거대한 일은 江이 흐르듯 쉽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敎訓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누군가가 시작하지 않고는 성취될 수 없다는 교훈도 명심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의 「매스콤」은 지금 一元化로 재정비되고 한걸음 나아가 강화될 시기에 임박했다. 그것은 절실한 과제인 것이다.
李元敎(中央日報 編輯局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