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矯導所(교도소) 고중열씨의 「傳敎實話(전교실화)」를 連載(연재)하며
千態萬象(천태만상)인 人生(인생) 絞首臺(교수대) 앞서 지켜본 15年(년)
갖힌者(자)와 지키는者(자) 間(간)의 담을 헐은 「사랑」의 實踐記(실천기)
발행일1966-07-17 [제527호, 4면]
직업의식(職業意識)이란 하나의 타성(惰性)으로 떨어지기 쉽다.
하물며 일반사회로부터 타매(唾罵)되고 법률이 그들을 처단한 수인(囚人)들을 다루기 15년, 그러나 필자(교도관)는 그런 단순한 직업의식을 넘어서 『전체적인 사회조직체 안에서는 범죄의 상대적 조건이 무시되어』버림과 동시 인간조건 또한 무시되고 획일적으로 취급될 수 밖에 없는 수인들의 개개의 운명에 깊은 그리스도적 연민과 이해를 지님으로써 버림받은 자들에게 새로운 생명의 뜻과 희망을 밝히려 혼신을 기울였다.
예수성심시녀회 고 골롬바 수녀의 오빠이며 서울교도소의 교도관 고중열(분도)씨(서울 麻浦區 大興洞 240, 용산본당 신자)는 이러한 산 신앙의 기록인 「전교실화」 『한마리 길잃은 양을 위해』 앞으로 많은 기대리에 24일자부터 제2면에 연재하게 되었다. (편집실)
【포로로그】
- 양 백마리중 그중 하나를 잃어버리면 아흔아홉을 들에 버려두고 잃어버린 것을 찾아가서 그 양을 찾지 않겠느냐? 그 양을 얻으면 반가이 자기 어깨에 메고 집에 돌아와서 친구와 이웃을 청하여 이르되 「잃은 양을 찾았으니 나와 함께 즐거워하자」 않겠느냐- (누까 15 · 4-6)
내가 교도소라는 이방지대인 이곳 담안에서 호구지책의 수단으로 여섯식구의 목줄을 걸어놓고 소위 말하는 간수(교도관) 노릇을 한지도 어언 1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누구나 다 자기 직업에 대한 실증을 느낀다면 나도 그 예외일 수는 없지만 그러나 이러한 천업(?) 가운데에서도 유일한 보람을 느끼며 항상 천주님께 감사드리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의 이 교도소 안의 전교사업이라고나 할까.
갇힌 자와 지키는 자의 심리적인 문제는 좀처럼 완화되기 어려운 일이지만 나는 항상 이러한 장벽과 거리감을 제거해 보려는 가운데 사회와 거리가 먼 특수 지역에서 사회로부터 버림을 받은 극한의 긴박한 현실 앞에 놓인 특수인간을 모든 점에 있어서 제한된 특수방법으로 그들을 전교해 보려고 할 때 역시 그들에게도 신앙은 유일한 희망이요 생명이라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은 너무나도 보편적인 사실일까.
15년이란 세월. 그동안 나는 수없는 사형수들을 보았고 또 그들은 지나갔다.
마치 화면에 나타나는 영상과도 같이 나타났다가는 사라지는 그 수없는 환상들 중엔 아무 미련없이 그냥 스치고 흘러가는 그림자가 있는가 하면 눈물을 남긴 사람, 무상(無常)을 남긴 사람, 철학을 남긴 사람, 신앙을 남긴 사람, 그리고 또 내 가슴에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정을 남겨주고 간 사람도 있었다.
사회를 경이와 공포의 도가니 속에 몰아넣던 신문 제3면의 「히로인」들, 눈앞에 있으면 마치 같은 인간이 아닌 것처럼 끔찍스러운 증오의 대상, 악의 표본.
왜 그들은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또한 이러한 결과를 받지 않으면 안되었던가?
그러나 나는 그 이면을 들추고 싶지는 않다. 하필이면 불행이 그 사람의 운명에만 주어진 것이라면 이것은 애꿎은 숙명이라고나 할까.
아-그러나 나는 이 지상에서 어디에도 볼 수 없었던 가장 고귀한 아름다움을 보았나니 그것은 천주님의 품안으로 돌아가면서 홍수처럼 쏟는 그들의 참회의 눈물이다.
『하느님은 진심으로 후회를 하면 그것으로 모든 죄를 참회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아무리 정신이 흐려진 사람이라도 - 그 눈이 한시간 동안이라도 진심으로 후회하는 눈물에 젖는다면 구원을 받은 것이나 다름 없다.』 -
그리하여 이세상에는 발붙일 곳이 없었던 「그레고르쓰」(토마스 만의 「선택된 인간」의 주인공, 편집자 註)는 선택된 인간이 되지 않았던가.
이로써 나는 세상에 버림받은 이 가련한 존재들의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전교의 사명감을 갖고 직업에 대한 중책감을 느끼며 이 자리에 보내주신 천주님의 뜻에 감사를 드렸다.
이제 내 기억에 남아있는 눈물을 남기고 간 몇 사형수에 대한 전교이야기를 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