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傳敎實話(전교실화)] 길 잃은 양을 위해 (1) 死刑囚(사형수) 62番(번) ①
발행일1966-07-24 [제528호, 2면]
지금으로부터 약4년전, 그러니까 1962년 4월 13일.
당시 나는 6사상(舍上) 담당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교도소는 여러감방이 있고 각 舍는 상하로 나누어지며 교도관을 담당이라고 부른다.) 그렇게도 못견디게 조여 붙이던 추운 겨울도 어제 인듯, 제법 훈훈한 봄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취침나팔이 울린지도 한참을 지나 어둠은 대기를 누르고 멀리 담밖에서는 전차 자동차 소리가 이따끔씩 들릴 뿐 각 사방은 쥐죽은듯이 고요했다.
다람쥐 채바퀴 돌듯 하는 내 생의 굴레를 새삼 반추하면서 나는 지루함과 적막을 메꾸기 위해 뒷짐을 진채 긴 복도를 왔다갔다 했다.
문득 <어제 휴게실에서 듣자니 광주에서 몇사람의 사형수가 왔다던데 혹시 우리 사방(舍房)으로 오지나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다시 하염없는 상념에 잠겨 있노라니 문득 아래층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고 연이어 쿵쿵 발자국 소리가 올라온다.
이윽고 한 죄수를 데리고 배방담당이 나타나 6사상 16방에 그를 들여 보내고 돌아간다.
보통 키에 적당한 체구. 우뚝한 코와 꼭다문 입술, 안경을 쓴 타원형의 말쑥한 얼굴은 첫눈에 보아도 여성적이며 무척 얌전한 인상이어서 푸른 수의에다 두손목에 수정(수갑)을 찬 그의 초췌한 몰골이 거의 애틋할 지경이다.
이름조차 여자처럼 박순옥, 수인번호 62번, 그런데 뜻바ㄸ에 그의 죄목은 살인 · 강간치사다.
이튿날 나는 그를 개별적으로 불러 내어 그 끔찍한 범행동기를 알아보려 했다. 처음은 약간 수집어 하면서 해피하는 것 같았으나 나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물어보았다.
『형(刑)은 얼마나 받았나요?』
『광주 고법에서 사형언도를 받았읍니다.』
『네에, 그래 서울 대법으로 상고해 왔군요?』
『네.』
그는 약간 고개를 숙이고 눈은 아래로 뜬 채 조용히 대답할 뿐이었다.
『누가, 집에서 면회 오는 사람은 없나요?』
『아무도 없읍니다.』
『그럼 가족이 없나요?』
『네 아무도 없읍니다.』
『친척도?』
『네』
후에야 안 일이지만 그에겐 부모와 형, 형수, 그리고 남동생들, 제수, 여동생 둘에가, 조카가 다섯인 대가족이었다. 그런데도 집과 연락이 없었던 것은 이미 사형까지 언도받은 그를 피차 만나보기도 괴로운 일이었고 그래서 아주 단념해 버린 모양이다.
허지만 그는 말할 수 없는 환멸과 의지할 곳 없는 서러움과 고독 속에 허우적거리며 그래도 기적과 같은 한가닥 희망이라도 휘어잡으려 눈먼 방항을 했으리라.
이로부터 나는 절망의 암야에 빠져 단말마의 경련을 일으킬 그의 가련한 영혼에 어떻게 하면 인간적인 위로를 줄 수 있으며 피안에 안식할 영혼의 경지가 있음을 예시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어떻게 된 사건인가요?』
나는 진정을 담은 부드러운 권유처럼 조용히 되묻곤 했다.
그의 고향은 전라북도 김제군 백구면 월봉리로서 고향에서 백구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쭉 농사일을 하다가 1954년 5월달에 군에 입대했다.
3년후인 1957년 11월에 만기 제대를 하고 계속 농사일을 하다가 1959년 12월 12일, 이리시(裡里市)에 있는 崔童心(가명 · 당시 26세)이란 여자와 결혼했다. 즉시 한마음에 사는 조찬보(가명)씨 집에 셋방을 얻어 한창 신혼의 단꿈이 무르익을 무렵, 1960년 8월 1일 밤 9시경, 뜻밖에 사랑하던 아내가 홀연 종적을 감추었다. 결국 아내는 결혼전부터 사귀어오던 정부가 있었고 그날 저녁 그와 몰래 도망을 쳤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