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알려지지 않은 교회사] 權日身(권일신) 등 敎會創立(교회창립)에
英雄的(영웅적) 課業(과업) 成就(성취) 敎會史上(교회사상) 稀貴(희귀)하고
「眞理(진리)」 찾아서 터득 43年間(년간) 牧者(목자)없이 敎勢(교세)늘려
발행일1965-08-29 [제484호, 4면]
한국교회의 창립은 이미 모든 교우들이 알고 있는바와 같이 어떤 선교사의 힘을 빌리지 않고 학자들이 스스로 천주교의 진리를 깨달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세계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희귀한 일이다.
여기에서 말하려는 것은 교회의 창립만이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 이룩되었을 뿐만아니라 교회의 육성도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였다는 사실이다.
목자없이 43년 동안 살아오면서 또한 심한 박해속에서도 교세는 늘어나기만 했으니 참으로 기적의 교회라고 불리울만하다고 이원순(李元淳·史學家)씨는 강조한다. 이웃 일본의 경우만 보아도 「도꾸가와 이에미즈」 대박해 그리고 「시마바라」난에서 완전히 교회활동이 중지되었지만 우리는 잠시도 중지되어 있지않고 계속 교세가 늘어나기만 했으니….
1784년 「북경」을 찾아간 이승훈이 영세를 받고 돌아오는데에서 한국천주교 발생의 시초를 둘수 있겠다. 양반집에 태어난 선비, 이승훈, 권일신, 이벽 이들은 교회의 창설자이다. 김범우 집에서 집회를 가지다가 적발된다. 김범우는 그때 순교했는데 최초의 순교자이다.
이일이 있은 후 조직이 있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이벽을 신부로 권일신을 주교로 하여 소위 한국의 가성직시대가 계속된다.
1차적으로 10년 동안 성직자없이 4천명이 넘는 신자들을 상대로 교회를 발전시켜오다가 1789년에 교리책을 자세히 연구하여 본 결과 의심을 품게되어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편지를 보낸다. 구베아 주교는 즉시 해산령을 명했다.
이렇게되니 교우들은 목마르게 목자를 보내줄 것을 원하였다. 드디어 10년 만인 1794년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처음으로 맞아들인다. 교우들의 기쁨과 뜨거운 신심은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최초의 유일한 주신부는 6년 만인 신우박해에서 순교하고 말았다. 당시 유교도덕을 지키지 않는다고 천주교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주신부를 잃은 교우는 다시 고아로 버려진채 33년이란 긴 세월을 지낸다. 그렇다고 교회활동을 중지하거나 결코 실망하지 않고 서로 신덕을 붇돋으면서 계속 성직자 영입(迎入)운동에 나섰다. 주신부를 비롯하여 신우박해때 목숨을 잃은 교우가 3백여명이 되지만 교세는 쇠퇴할 줄을 몰랐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23세인 정하산·권계인, 유진기 제씨가 중심이 되어 「북경」을 아홉번씩이나 드나들면서 간청했지만 여러가지 어려운 사정으로 차일피일 연기되기만 했다. 반세기에 가까운 세월 목자없이 방황하는 신앙생활이었지만 교우들의 한결같은 신심은 드디어 결실을 맺어 주신부 세상을 떠난지 33년만인 1833년에 중국인 유방제 신부와 1836년 불란서인 라신부를 맞이하게 되었으니 우리 후손들은 절로 머리 숙여진다.
이러한 교회사를 가진 한국교우들은 스스로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면서 좀더 조상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기 위해서 각자가 더욱 신심생활을 위해서 분발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지금 여러가지로 어려운 사정에 있다. 허지만 우리는 이 어려운 사정속에서 좀더 천주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기쁨을 발견할 수가 없겠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