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國籍(국적) 없는 小女(소녀) (110) 蘭草(난초)와 채송화 ⑪
발행일1965-08-29 [제484호, 4면]
그 후 한달동안 나의 마음은 지남철에 끌리는 쇠부스러기 같이 그에게로 이끌리었다. 그간 진호한테서는 소식이 끊어졌는데 짐짓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던 중 하루는 저녁퇴근 무렵에 잡지사로 진호가 불쑥 나타났다. 마침 「미스터」배는 밖에 나가고 없던 중이라 곧 그를 데리고 잡지사직원들이 잘 안가는 외진 다방으로 들어갔다.
「미스터」배와의 관계를 솔직히 말해 버릴 생각이었는데, 차를 마시는 동안, 조금도 의심하는 기색이 없는 진호의 구김살 없는 표정을 보니 오히려 말문이 막히었다.
『석달 후에는 제대가 돼, 과외공부 가르치던 아이의 아버지네 회사에 취직이 내정되어있어요. 월급은 8천원가량이지만, 밤에는 과외선생노릇을 계속할 작정이야. 「미스」양도 애기가 생기기까지는 과외선생을 계속하는게 좋을거야! 그만하며 우리들의 생활은 걱정이 없는데, 부모님께 다소 생활비를 도와드려야겠어? 아버지는 건강이 좋지 못하시니까!』
진호로서는 다소 걱정이면서도 그러한 설계를 즐거운 듯이 말한다.
『우리 아버지는 어떻게 하죠! 나에게 의탁하고 계시는데…』
『그 문제도 생각했어. 우리 부모님과 같이 계시게 하지!』
『우리 양부는 퍽 변덕스러운 성격이라, 남과 어울리기가 어려워요!』
『그런거 걱정없어, 혼자 보다는 친구가 생겨 외려 좋을거야!』
진호의 낙관하는 태도에 내마음은 나도 모르게 다소곳이 끌려가고 있었다. 나로서는 모가나서 걸리는 일도 진호는 둥글게 다듬어버리는 힘이 있었다. 이순간 마주친 진호의 눈에는 나에 대한 사랑이 빛나고 있었다.
바로 우리 옆의 「박스」에는 다방 「마담」이 찾아온 친구되는 여자와 아까부터 소근소근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이때 「마담」의 목소리가 컸다.
『…마음만 착하면 뭘해, 남자란 생활능력이 있어야지, 고슴도치같이 생긴 남자라도 돈만 많으면 나는 좋겠어… 정말은 남자도 일없어, 그저 돈만 2백만원쯤 있었으면 두다리 쭉뻗고 남한테 굽신거리지 않고 편안히 한평생 보내겠구먼.』 반웃음으로 「마담」은 주위의 사람이 듣든말든 지껄여댄다.
진호는 그 쪽으로 눈도 걷어보지도 않았으나 나의 귀에는 호심에 떨어진 돌덩어리 같은 반응이 있었다.
『…2백만원으로 한평생이면 6백5십만원이면 세평생 아닌가?』
한시간쯤 후에 진호와 다방을 나설적에 나는 혼자 그런 계산을 하고 있었다.
「미스터」배가 찾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서도 진호가 가자는 대로 저녁식사도 같이 하고 산책도 했다. 그러나 내마음은 그와같이 다니는 시간에 6백5십만원쪽으로 굳어지고 있었다.
일주일 후 「미스터」배와 나는 정식으로 약혼을 하였고 이주일 후에는 결혼식을 올렸다. 불쑥 진호가 찾아올가바 그의 집에만은 양부를 통해서 알렸다.
산동리 오막살이에 비하면 대궐같이 넓은 「미스터」배네 집에서, 나의 아침저녁은 새생활로 들어섰다.
양부는 외딴 뒷채의 조그마한 방에서 기거하게 되었고 넓은 뜰을 이따금 거닐면서 나와 그 자신의 행복을 다행이란 듯이 일찌기 보지못하던 미소를 나에게 던졌다. 결혼 당초 한이주일간은 일찌기 경험하지 못한 보라빛 꿈의 장막을 헤엄치듯 흐뭇한 것이 내 주변에 가득했다. 그러나 한달이 채 못가서 허전한 공간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미스터」배는 매일밤 술에 만취해서 자정이 가까워서 들어왔고, 일주일이 길다고 이삼일씩 외박을 했다.
지방에 출장갔단 그의 말을 처음에는 곧이들었는데 총각시절에 지방출장 일이 거의 없었던 것이라 의심이 치민다.
그에 대한 복수로 나는 그에게서 돈을 짜내어 엄청나게 비싼 옷을 해입고 패물들을 사모았다. 누구 부럽지 않게 옷차림을 갖추고 다니었으나 집에 돌아오면 메울수 없는 허전한 공간에서 바람이 일었다. 시아버지 손때가 묻은 온실 화분들을 바라보며 다소곳한 진호의 모습을 머리에 그리었다.
진호는 그간 제대를 하고 취직이되어 결혼말이 있다고 풍문에 들렸다.
잡지는 육개월 후에 2백만원의 손해를 보고 폐간이 되고 말았다.
잡지에 실패한 「미스터」배는 은행에 집을 저당하여 다방을 시작했는데 주방 사람들이 설탕이며 커피 등을 팔아먹었느니 하여 다섯달 동안에 본전의 반도 못 건지고 팔아버렸다.
그 후도 그는 무얼한다고 「미스터」꼬마를 데리고 왔다 갔다 하였으나 흐지부지되고 알고보니 어느듯 그는 증권에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의 산 주가 하루는 십오배로 껑충 뛰어올라 7, 8백만원이란 막대한 돈이 굴러 떨어졌다.
이때, 그는 푸지게 나에게도 돈을 주었고, 2십만원주고 피아노도 사들였다.
나의 주변은 다시 밝아졌다.
어딘지 그때부터 「미스터」배가 위대하게 보였었다. 진호의 모습은 빌딩 옥상에서 내려다보이는 행인같이 나의 시야에서 조그마해졌다.
보름이 지나자 「미스터」배가 사둔 증권은 대폭락을 하여 먼저 번 돈을 솟박잃게 되었다. 하루아침에 얻은 재산은 하루아침에 이슬같이 꺼지고 말았던 것이다.
얼마 안가서, 집을 팔고 조그마한 한옥으로 옮겼는데 그 돈도 다 들어먹고 다시 전세 집으로 옮겼다.
드디어는 전세 돈까지 빼내고 시어머니와 양부와 나는 산동리의 조그마한 흙벽집으로 옮겼다. 그때는 집안에 세간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피아노가 팔린지도 오래였고 다만 내 옷가지와 감춰 두었던 몇개의 패물만이 내 수중에 남아 있었을 뿐이었다.
「미스터」배가 마지막 희망으로 건 XX주도 결국은 오르지 않고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간의 시간, 불과 일년, 이제 「미스터」배는 그날의 담배값도 아쉬운 인간이 되고 말았다.
내가 감춰 두었던 몇개의 패물은, 네식구의 끼니 꺼리를 위해서 하나 둘 사라졌다. 잘살던 아버지 시절을 그리워하며 한탄에 가득 찼던 시어머니는 하루아침 고통도 호소하지 않고 눈을 감아 버렸다. 시아버지가 떠났을때, 그렇게도 많았던 조객들이건만, 이제 산동리에 찾아온 조객은 몇안되었다. 죽을 임시에 교회에 며칠 다녔던 덕분에 교회에서 교우들이 와서 밤을 세워주었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한달 후에는 「미스터」배가 홀연 몸을 감추웠다.
소문에 들으면, 어떤 다방 「마담」을 찾아 부산으로 갔으리라고 하고 혹은 어디서 새로 금전이 생겼는데, 그 금전판에 갔으리라고 하였다.
다행히 나에게는 아직 그의 어린아이가 없었다. 아이들의 대변과 쓰레기가 딩굴고 있는 산동리 언덕 바지에서서 나는 지나간 일년을 돌아보았다.
아침 안개속에 묻힌 동쪽 기와지붕 틈사이의 진호네집 쪽을 더듬어 보았다.
그는 한달전에 결혼했었다.
나는 입은 옷 그대로 언덕을 내려서 교회쪽을 향하여 걸었다. 한동안 까마득히 잊어버렸던 교회 안으로 나는 들어섰다.
진호가 어떤 여성과 결혼을 했나 한번 보고 싶었다.
맨 뒤에 앉아서, 두리번거려 보았으나, 교회안은 사람이 꽉 차서 찾기가 힘들었다.
벽에 걸린 성모마리아 그림을 향하여
『나는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하고 맘속에서 물었다. 성모마리아의 시선은 조용히 아래로 깔리어 있을 뿐이었다.
미사가 끝나자, 나는 먼저 나와서 교회마당 한 모퉁이에 있는 전나무 그늘에 얼굴을 가리고 서서 나오는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얼마쯤 지나니 진호가 예쁘장하게 생긴 그의 아내와 함께 나란히 성경책을 들고 나오더니 여러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며 다정스러이 교회문을 나선다.
나는 슬슬 그의 뒤를 따라 그들의 뒷모습을 보다가 네거리에서 헤어졌다.
오전의 햇살은 내 고무신 발등에 밟히며 오락가락했다. 네 평생을 호강하고 살리라고 생각했던 6백5십만원이 일년만에 거품같이 사라진 자국이 내 몸 그림자 속에서 감돌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