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公議會(공의회) 回顧(회고) 展望(전망)] (上)
萬民(만민)의 救援(구원) 위해 現代(현대) 適應(적응) 길 摸索(모색)
共産主義(공산주의) 科學文明(과학문명) 桃戰(도전)받고 現代世界(현대세계) 宗敎不信(종교불신) 貧困(빈곤) 失業人口(실업인구) 戰爭(전쟁) 등 混亂增加(혼란증가) 司牧方策(사목방책) 進步(진보) 保守(보수)로 兩論(양론)
요안 敎皇(교황) 達觀(달관) 會議進行(회의진행)하며 晩覺(만각) 開催如否(개최여부) 贊反兩論(찬반양론) 參加主敎(참가주교) 會議場所(회의장소) 前會議(전회의)4倍增(배증) 第(제)1會期(회기)는 修練期(수련기)
【RNS 特信】 오는 9월 14일 「바티깐」 공의회 최종회기인 제4회기가 개최된다. 『길은 「로마」로…』 지금 이 시간에는 전세계 각국으로부터 주교들 수도자 및 평신자대표, 타교파 「옵서버」들 및 신문기자들이 이 역사적인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성도(聖都)로 모여들고 있다. 한국주교단도 9월 7일 전국교회의 축원을 받으면서 「로마」로 향해 김포공항을 떠날 것이다. 이같이 최종회기개막을 목전에둔 이 시간에 다시한번 이미 가톨릭교회안에서 뿐아니라 전그리스도교 세계에 신앙과 정신의 혁신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제2차 「바티깐」 공의회 유래를 살펴보고 앞날을 전망해봄은 무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기지의 사실과 같이 이번 공의회는 고(故) 요안 23세에 의해 소집되었다. 공의회소집의 뜻을 요안 23세 교황이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표명한 것은 1959년 1월 25일 「로마」 성(城) 밖에 있는 성 「바오로」 대성당에서의 식전중(式典中) 추기경들에게 행한 담화를 통하여서였다.
공의회소집의 뜻이 이같이 공식적으로 발표됐을때 세계교회는 이를 환영하였으나, 교회안에 일부에서는 『교리적으로 큰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닌데 무엇때문에 공의회를?』하는 논평도 없지 않았다. 과연 과거의 공의회역사를 살펴본다면 공의회는 대개 교회안에 교리적인 큰 문제가 있고 혹은 교회가 이단(異端)의 위기에 놓여있을 때에 개최되었다. 그런대 비해 오늘날의 교회안에는 해결을 위해 공의회를 꼭 필요로 할 만큼 큰 교리상의 쟁점(爭点)이 있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교회는 아무런 문제의식도 없이 안이(安易)할 수 있었던가? 그것은 아니었다.
비록 교회는 현대에 들어와 근세기(近世紀)에 있어서와 같이 반교회주의적인 공격의 집중화살은 받고 있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인류의 3분지1이상을 지배하고 있는 공산주의 박해하에 침묵의 교회문제를 비롯하여 기술문명에 도취된 현대인의 종교에 대한 불신, 무엇보다도 심각한 그리스도교의 분열상, 그밖에 전후 우후죽순처럼 일어난 신생국가들의 민족주의, 빈곤, 실업, 인구문제, 전쟁과 평화문제 등 교회가 직접간접 그 해결에 노력하여야할 많은 문제들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요안 23세가 공의회소집을 결정한 그 시간까지는 교회내 아무도 이같은 문제들의 해결을 위해 공의회가 소집돼야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공의회소집이 얼마나 긴요한 것인지 또 그것이 전체교회와 세계의 오늘과 내일을 위해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 모든 사람들로부터 인식된 것은 공의회준비가 진행되어가는 도중, 보다더는 공의회가 현실적으로 소집되었을 때에 일이었다.
제2차 「바티깐」 공의회의 첫 난문제는 교황을 비롯하여 세계주교들 중 아무도 공의회운영에 대한 경험자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교회사상 공의회는 모두 합쳐 20차 있었고 그 ___것인 제1차 「바티깐」 공의회가 있은 지는 이미 80수년전 일이었다.
뿐만아니라 그 규모에 있어 역사상 가장 큰 공의회라는데서 오는 문제도 적지 않았다.
첫째 주교들의 수만하여도 제1차 「바티깐」 공의회시에는 불과 7백50명이었고, 그들의 회의장소는 「베드루」 대성당 서간편(書簡偏) 수랑(袖郞)이었는데 비해 제2차 「바티깐」 공의회는 세계 모든 민족과 인종을 대표하는 무려 2천5백여명의 주교들의 모임이요 회의장소도 대성당 본진(本陣)을 다 차지한다는 큰 차이가 있었다. 만일 이 주교들이 각자 다 10분간의 규칙발언을 한다면 공의회를 끝맺기 위해서는 무려 20년이란 긴 세월을 내다보아야하는 것이다.
요안 교황은 그 인품이 온화하고 거룩하여 자부적인 힘을 가졌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였으나 통솔력이 강한분 같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1962년 10월 11일 공의회가 드디어 그 막을 올렸을때 행한 그의 개회사는 공의회를 소집한 그의 심오한 뜻을 잘 드러냄과 동시에 공의회의 방향을 확연히 제시하는 것이었다. 그는 「불운(不運)의 예언자」들을 배격하면서 인류역사를 궁극적으로 구원으로 이끄시는 천주섭리에 대한 굳은 신뢰를 토론하고 또한 모든 이에게 그 같은 신뢰를 불어넣을 수 있었다.
그는 공의회가 전통교리를 재확인하기 위해서 소집된 것도 아님과 같이 어느 누구 혹은 무엇을 단죄하기 위해서도 아님을 말하고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심은 심판을 위해서가 아니고 만인의 구원을 위해서임을 확신케 하였다. 요안 교황의 소신에 의하면 교회가 이 시대에 필요로 하는 것은 진정한 그리스도교의 양심과 생활의 소생내지 형성이다.
그러나 이 그리스도교를 전달하는데 있어서는 현대적인 탐구와 전달방법을 취해야하며 그의 표현에 의하면 『신앙유산인 오랜 전통교리자체를 수호함과 이를 표현하고 전달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아뭏든 요안 교황이 제시한 제2차 「바티깐」 공의회의 목적은 온전히 사목적인 것이며 주교들이 상의하고 결의할 것도 한마디로 그 자체를 보다 더 잘 현대세계에 드러낼 수 있으며 어떻게 하면 교회는 인류구원이란 그 본래의 사명을 더 잘 완수할 수 있을 것인가이다.
1962년 10월 11일에서 동년 12월 8일까지 계속된 제1회기는 주교들을 위해 하나의 필요한 수련기였다.
이 동안에 주교들은 무엇보다도 서로를 처음으로 잘 알 수 있었다. 이 회기중 결론을 본 의안은 하나도 없었으나 그들은 각자가 또한 주교단으로서 어떠한 사목적 큰 사명을 인류 세계위에 지고 있는지 잘 인식할 수 있다. 물론 서로 사이에 견해차도 있었다.
크게 나누어서는 보수 혹은 진보적이라고도 표현되고 있는데 흔히 지적되는 대로 옷따비아니 추기경을 위시한 보수주의적 주교들의 견해에 의하면 교회는 오늘날 무신론과 불신주의적 세력에 저항하여 인류구원을 위해 싸우는 진리의 보류(堡壘)이요, 따라서 이같은 위기에서 교회가 취할 길은 모두가 전통적 신앙에 충실하고 일치단결하여 일어서게 하는 것이다.
그들에 의하며 교회안에 변화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옷따비아니 추기경의 문장(紋章)에 「SEMPER IDEM」(영구불변)이라고 기록돼있는 것은 무의미한 내용이 아닌것 같다.
반대로 진보주의적 주교들의 견해를 들으면 그들이 보는 교회는 위기를 부르짖을 만큼 현대세계로부터 공격받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요,
오늘날의 신학이 필요로 하는 것은 오랜 전통 진리를 현대지성에게 현대적인 방법을 통하여 전달함으로 현대에 구원을 가져오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주교들의 주장은 요안 교황의 그것과 같이 현대에 있어서의 교회의 사명은 세계를 단죄하는 것이 아니요, 사랑과 대화로써 세계를 -무신론자와 불신론자들까지 포함한 현대세계를 구하는 것이다.
이같은 정신은 무엇보다 먼저 「교회전례안」에 반영되어 주교들은 이미 반(半) 세기가 넘는 교회의 전례운동을 토대로 전례의 현대적 쇄신을 강조했다.
여기서 가장 「토픽」으로 논의된 문제는 신자들의 적극적이요 능동적인 전례참여를 위하여 모국어를 전례용어로 도입하자는 것이었다. 제1회기중 토의된 다른 의안들은 「계시(啓示)안」 「메스·메디아」 「일치안」 「교회안」 등이었다.
그중 가장 격론을 야기시킨 것은 「계시안」이었으며 많은 주교들은 과거 전통을 따라 계시의 원천을 성경과 성전의 이원적(二元的)으로 말한 동안을 전면수정하기를 요구하였다. 하지만 표결결과는 1,368대822라는 3분지2미달로 나타나 수적으로는 수정을 요구하는 주교들의 의사가 강력히 표시된 것이었지만 회의법상 통과는 보지못한 셈이 되었다.
그러나 요안 교황은 이안의 수정을 요구하는 주교들의 의사를 존중하여 동안의 검토를 공의회신학위원회와 성경학자인 베아 추기경이 영도하는 일치촉진국의 「멤버」들로써 편성된 합동위원회에 의뢰하였다.
제1회기 마지막 주간에 쉬넨스 추기경은 몬띠니(현교황), 렐까로 추기경들의 찬동 발언하에 공의회 토의업무를 중점적인 원칙하에 진행시키도록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제의한 원리는 교회는 무엇이며 또한 교회는 인류세계에 대하여 지고 있는 그의 사명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