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티깐 NC】 『바다물이 마르고 마귀가 천당으로 되돌아갈 때 평신도는 성직자를 돕게 되리라』는 중세기의 고대 라띤어 속담이 있다. 주위엔 아직 물이 많고 지옥이 폐쇄될 징조는 전혀 없지만 제2차 「바티깐」 공의회는 기꺼이 이 어리둥절케하는 속담을 단연 잠재우고 말았다.
평신도들은 교회사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숨어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은 생명을 걸고 신앙을 전파하는 때가 많았고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최초의 변증자들이었으며 신학을 하나의 학문으로 확립시켜 위대한 신학도들을 지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신학적인 분야에 있어서 평신도의 역할이 이렇게 현저함에도 불구하고 신학은 평신도와 그들의 사명에 대한 고찰을 심각하게 지연시켜왔다.
제2차 「바티깐」 공의회는 교회역사상 처음으로 평신도에 간한 의안을 제출케하고 회의중에 평신도의 발언을 듣는 「스케줄」을 짜는 등, 이 문제를 별도로 취급하고 있다. 평신사도직에 관한 문제는 이번 공의회의 뒷치닥거리 같은 의제가 아니었다. 1959년 공의회 소집을 맨 처음 준비하던 단계에 이미 평신사도직문제에 관한 준비위원회는 「바티깐」 공의회 성성에서 짠 이번 공의회 체계속에 들어있었던 것이다.
이듬해 6월 5일 교황 요안 23세는 공의회의 준비위원회들을 설치했고 그 가운데에 『무엇보다 종교적 및 사회적인 분야에서의 가톨릭 「액션」 문제를 다룰』 평신사도직 위원회를 창설했다.
일곱번의 본회의를 거쳐 일년반이 지난 후 이 위원회는 1백70「페이지」에 달하는 네 가름된 초안을 공의회 중앙협의회에 제출했다. 공의회가 개최되기 두달전인 1962년 8월 6일 「평신사도직 언론출판 및 연예(演藝)」 위원회를 포함한 10개의 공의회위원회가 설치되었다.
비록 제1차 회기중에는 준비위원회가 제출한 초안이 공의회의 의제가 되지는 못했지마는 다른 여러가지 문제들과 더불어 평신 사도직에 관한 문제는 개혁이 실현되어가는 분위기와 강조속에서 논의되었다.
동시에 평신사도직에 관한 문제 중 많은 안건들이 다른 의제에 말려 들어감을 어쩔 수 없었다. 첫회기가 끝나자 평신사도직 위원회는 그 초안의 교의적 내용의 대부분을 교회의 본성을 말하는 「교회의안」으로 이양하고 그 수정사업에 착수했다. 평신도에 대한 교리적인 내용은 제3회기 마감에 발표된 「교회헌장」 제4장에 들어있다.
또 어떤 문제는 평신사도직 안에서 떼내어 교회법 개정을 떠맡은 공의회 특별위원회로 넘겨졌으며 또한 다른 문제들은 현대교회에 관한 초안을 준비하는 혼성위원회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들은 제4회기중에 토의를 끝낼 것이다. 1백70「페이지」나 되던 평신사도직의 초안이 지금은 다만 서론과 결론 그리고 일반적 경우와 특수한 경우에서 평신사도직을 처리하는 문제를 포함한 48「페이지」로 줄어버렸다.
1963년 12월 2일 독일 「엣센」의 행스바흐 주교가 이 초안을 공의회에 제안하고 간단히 보고했다. 그날은 제2회기가 끝나는 날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 토의할 시간이 없는데다가 교부들은 보다 더 개혁해야할 어떤 문제에 대한 제의서를 써서 제출하기로 되어있었다.
이러한 결과와 또한 자료를 줄이라는 공의회 중앙위원회의 요청으로 평신사도직위원회는 수정사업을 또다시 시작했다.
이번에는 3개의 분과위 대신에 5개의 분과위로 나누고 초안을 대폭 줄여서 단지 14「페이지」 밖에 안되는 것을 1964년 5월에 공의회에 제출했다. 이 초안은 서론과 5개 분과위에서 한일과 부합되는 5장(章) 즉 ▲평신도의 사도적 소명 ▲평신도가 생활하고 있는 공동사회 및 환경 ▲평신도의 목적 ▲평신도의 조직체 ▲끝으로 평신도와 성직계급과의 관계 및 다른 그리스도교 신자들이나 비그리스도교 신자들과 함께만들 수 있는 협동체,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1964년 10월 6일 마침내 공의회의 의제가 된것이 바로 이 초안이었으며 평신사도직 위원회의 의장인 교황청의 페르난도·센토 추기경이 제안했던 것이다.
성세성사에다 평신도가 지닌 소명의 근거를 두면서 그는 『영세한 사람으로서 자신을 한 사람의 사도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은 진실한 그리스도교 신자일리가 없다』고 절대적인 어조로 갈파하였다. 이 초안은 전회기에 평신사도직 위원회가 간단히 보고한 초안과는 다르고 또한 실로 새로운 것이기에 행스바흐 주교는 그동안 그 초안에다 어떻게 손질했다는 것과 어떤류의 초안을 만들었다는 것을 다시 설명했다.
그는 평신도에 대한 모든 문제를 총망라하려 하지 않았음을 예고하고 평신사도직에 관한 많은 안건들이 이미 다른 의제에 많이 말려들어가 버렸음을 지적하면서 초안을 너무 심하게 축소했기 때문에 약간 이해 곤란한 점이 있다고 부언했다.
죤P돈넬리 神父 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