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도착한 「가톨릭시보」기사도 읽었지만 다시 오늘은 전국가톨릭용어심의위원회에서 동 위원회 수개월간의 노력의 결과인 개정된 기도문과 같이 전국 교회여론을 조사한다는 동봉인쇄물을 받고 느낀바있어 한마디 하고자 한다. 먼저 동 위원회 위원제위의 수고에 경의를 표해 마지않는다.
「바티깐」 공의회가 내세운 교회의 현대적응이라는 목표아래 우리나라 교회도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는 하나의 예증(例證)이 여기 있기 때문이다.
또한 동 위원회는 존경할 선배 또는 전문가들로 구성되어 신중한 연구와 의견교환 끝에 개정기도문을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에 적어도 몇개의 기도문은 나의 동감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을 먼저 말해두고자 한다.
하나 나의 사견(私見)을 느낀대로 말한다면 자귀(字句)와 용어의 수정 또는 현대화보다 내용의 현대화가 아쉽다는 것이다. 외부적 도장(塗裝)만 하지말고 갈아댈 재목(材木)을 갈아냄으로써 실질적 쇄신을 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만 우리나라 교회도 「바티깐」 공의회를 참으로 생활하게 될줄 안다.
구체적으로 예를 「삼덕송(三德誦)」 특히 「신덕송(信德誦)」에 들어보겠다.
전에 「신덕송」이 수정되어 용어위원회는 하나의 시안(試案)을 내었다. 물론 두 경문사이에 변화 또는 진보(?)가 있음을 누구나가 인정한다. 하나 어디까지나 이는 자귀와 용어의 수정 또는 변경에 불과함을 지적않을 수 없다. 이 「신덕송」의 출처와 유래가 어떠한지 나는 과문(寡聞)이라 잘모르나마 하여튼 신학발전사에서 볼때 전(前)세기적 낡은 유물임에 틀림없고 그 경문의 기저(基底)가 현대적 신학사조에서, 그 동향에서 나온것이 아님에는 틀림없다.
중세적 그리고 전(前)세기적 교회의 철학신학이 스콜라적 또 이지적(理智的)이었다는 것은 주지하는 바이다.
우리의 현용(現用) 「신덕송」을 보면 신앙의 이지적 통기를(천주께서 속지도 속이지도 않으심)들어 역시 퍽 이지적(理智的)이다. 따라서 자연히 극히 정적이다.
이말은 성서적이 아니라는 말인 것이다. 성서가 주는 신앙의 동기는 오늘 우리 「신덕송」에 있는 것과는 좀 다르다.
이스라엘 민족들의 종교체험(宗敎體驗) 신앙체험은 역사체험에 결부돼있고 거기서 나왔던 것이다. 왜냐하면 천주께서는 역사안에 사건(EVENTS)들을 일으키시면서 이스라엘과 인류에게 당신을 계시(啓示)하셨기 때문이다.
달리말하자면 천주님은 행동함으로써 말씀하셨던 것이며 사랑의 구세(救世) 계획으로 역사안에 일으키신 천주의 행동, 사건, 이것이 곧 천주의 계시인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천주와의 접촉은 역사안에서, 생활안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와의 접촉에서 갖게된 그 신앙은 자연동적(動的)이고 활력있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즉 그들에게 있어 신앙이란 천주께서 사랑의 계획에 따라 역사를 이끌고 나가신다고 믿는 것이었다.
환언하면 신앙이란 우리는 천주의 힘으로 꽉찬 세계에 살고 있다고 믿는 것, 혹은 인간 역사는 천주의 현존으로 충일돼 있다고 믿는것 바로 이것인 것이다.
이런 내용을 우리의 「신덕송」에 넣어주었으면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만 역사안에서 생활하고 있는 구체적 인간이 이 「경(經)」을 외울 것이라는 점을 고려에 넣고 「신덕송」을 개정하는 까닭이 될 것이다. 물론 교회에 대한 말, 우리는 교회안에서 신앙한다는 뜻의 말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천주의 계시는 단체 또는 왕국안에서, 그와의 연관안에서만 이루어졌고 구세사를 오늘에 연장시키고 현실화시키는 곳은 교회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신앙자의 실존의 조건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우리 기도문개정은 특히 「삼덕송」은 자기의 전 실존안에서 구체적 인간이 외우는 경문이 되도록 해야겠다고 느끼는 바이다.
李哲熙(釜山敎區 尙書局長神父·「빠리」가톨릭大學서 敎理敎授法硏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