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알려지지 않은 교회사] 京畿(경기) 走魚寺(주어사)서 眞理(진리) 探求(탐구)
호랑이들 우굴대는 深山幽谷(심산유곡)서
李蘗(이벽) 權哲身(권철신) 丁若鏞(정약용) 등 教會(교회)창립에 先驅的(선구적) 役割(역할)
발행일1965-09-05 [제485호, 4면]
한국의 사신들이 중국 「북경」에 왕래하는 편에 「북경」에서 전교하던 이태리인 신부 리마두의 저작인 「天主實義」를 비롯하여 「性理眞詮」 「七克」 「科學」 「算數」 「原敎」 등에 관한 예수회선교사들이 저작한 서적을 얻어보고 스스로 천주님의 오묘한 진리를 깨달았으니 그 과정을 한번 알아보도록 한다.
한국천주교 창설의 선구자인 이벽을 비롯한 권철신 정약용 정약전 선배들이 번거로운 곳을 떠나 신비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는 자연의 품!
깊은 산속으로 찾아들어갔다는 사실이다. 거기에서 신심을 깨끗이 하고 천주님의 진리를 연구하는데 성공한 우리 선조들! 이벽은 엄동설한 눈이 펄펄 날리는 눈길을 더듬어, 천주의 진리를 기어이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불타는 의욕에 길을 떠났다. 한밤중에야 깊은 산속의 한 절에 이르고 보니 길을 잘못 들었음을 알았다. 반대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산은 매우 높고 눈은 덮혀있고 호랑이들은 먹이를 찾기위해 으르렁거리고. 하나 용감했던 이벽은 잠자고 있던 중들을 깨워서 길을 안내하도록 하고 호랑이를 막기 위해서 철장(鐵杖)을 짚고 밤길을 걸어서 목적했던 절에 도달하였다.
옛날부터 전하여 오던 선현들의 많은 학설을 거듭 토의하였지만 확고한 결론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던 중 비로소 만족할만한 천주교의 진리를 깨닫고는 얼음물에 세수하고 아침 저녁으로 엎디어 기도드리고 매월 7·14·21·28일에는 업무를 제쳐놓고 오직 묵상에만 잠기었고, 재를 지키는 열심한 태도를 보였으며 해가 돋으면 경재잠(敬齋箴)을 외우고, 정오에는 사물잠(四勿箴)을 외우고 해가 지면 서명(西銘)을 외우되 장엄하고 정성껏하여 규도를 잃지 않았다.
이같이 열심으로 수계(守戒)를 하고 전교까지 하면서 6년간을 지내다가 1783년 겨울에 이동욱(李東郁)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북경으로 가게된 때에 그 아들 이승훈도 함께 가게 되었다.
이벽은 이승훈에게 간곡히 부탁하기를, 북경에 가면 자세하게 천주교를 배우고 각종 서적을 얻어가지고 돌아오라고 부탁했다. 이승훈은 「베드루」라는 본명으로 영세하고 여러가지 성서와 성물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러면 우리 선조들이 한데 모여서, 천주님의 진리를 스스로 깨달았던 장소는 바로 어디였을까 신자라면 누누나 궁금하게 생각할 수 있는 문제이다.
이 숙제를 오랜 연구 끝에 풀어준 열심한 교우가 있으니 그는 바로 권녹암·정다산 그리고 이승훈의 후손과 역척간이 되며 병인년에 치명한 남승지의 친손인 남상철(南相喆)씨이다. 바로 그 역사적인 장소는 경기도에 있는 천진암·주어사(天眞庵·走魚寺)였다는 사실을 밝히게 되었다. 서울에서 1백10리나 되는 거리를 직접 답사했으며 앵자산 상봉인 앵자봉의 소재지인 하품리의 한노인의 이야기에서 큰 도움을 얻어 주어사를 발견하게된 놀라운 사실이다. 후에 여러 사학가들에게 의견을 물었던바 사적 참고서에 실려있는 내용이 서로 부합되어 있어서 틀림이 없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이렇게되면 그 장소는 우리교회의 성지가 아닐 수 없겠다.
우리선조들은 천주님의 특별한 섭리로서 오직 서적에 의해서 스스로 진리를 깨달았으니 아니 단지 깨닫고마는데 그치지 않고 생명을 바쳐서 이 진리를 증거하였으니 실로 장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우리는 여기에서 깨닫는바 매우 크다.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생활은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세속화 해가는 느낌이 없지 않아 있다. 시간에 쪼들려서 언제 묵상을 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는 교우가 많다. 떠들석한 소음속에서 마음에도 없는 웃음 이야기, 「제스추어」를 해야만 했다. 자칫하면 아주 이러한 속에 흠벅 젖어버리기가 쉽다. 어느 한계에서 용감하게 끊어버릴 수 있는 힘을 자랑스러운 선조를 가진 우리 후손들은 모두 갖고 있는지 모르겠다. 한적하고 깊은 산속을 찾아가지 못한다고 해도 조용히 영혼을 위한 시간을 마련하고 열심히 기구하고 묵상하는 습관을 길러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