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傳敎實話(전교실화)] 길 잃은 양을 위해 (3) 死刑囚(사형수) 62番(번) ③
발행일1966-08-14 [제530호, 2면]
그로부터 6개월 후 그의 내면 생활에 커다란 변화가 왔다. 그는 드디어 교리를 마치고 영세하기에 이르럿다. 더할 수 없는 실의(失意)와 자포자기의 구렁텅이에서 무형의 진리를 끌어잡고 체득하려는 그의 무딘 영혼이 필자적 자맥질은 곁에서 그를 이끌어주려 같이 허우적거린 나 스스로도 형언키 어려운 과정이다. 허지만 결과는 그이 절망을 구하기 위해 그보다 더한 고통을 치른 이의 승리로 끝났다.
나는 교무과로 연락하여 그해 9월 11일 오전10시경 교무과에 있는 김현우 교사님을 대부로 세종로 박기훈 신부님이 오셔서 세를 주니 그의 본명은 베드루였다. 그의 수의를 입은 초췌한 자태는 차라리 그 누구보다도 엄숙하고 「참다운 죄인」의 모습이었고 그의 하염없이 흐느끼는 눈물은 보는이로 하여금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이순간 나의 보람은 그와 더불어 느끼는 거의 애틋한 행복과 함께 오히려 눈물겨운 것이라고나 할까.
『담당님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나 순간의 괴로움을 참지 못한 지난날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괴로움을 참고 이겨 나가는 것만이 인생의 참 길입니다』
그후 그는 언제나 감방안에서 묵주를 움켜쥐고 있었다.
이듬해 1963년 1월 4일 그때 나는 인사이동으로 6사상을 떠나게 되었다. 아끼던 그였는지라 헤어지기가 무척 섭섭했으나 같은 소내에 있을테니 자주 만나게 되리라는 위로의 말을 남간채 지금있는 교무과로 왔다.
그러나 마침 구치과(拘置課) 미결수의 서적관계를 맡아보게 되어 그후 그와의 관계는 더욱 가깝게 되었다.
그는 많은 종교서적을 탐독하는 가운에 특히 「교부들의 신앙」과 「한국 79위 순교복자전」을 읽고난 후로는 더욱 깊은 신앙의 경지에서 만날때면 언제나 정온(靜溫)한 마음을 유지한다고 했고 이제는 어느때라도 죽음에 임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말했다.
성 원선시오 아 바오로회에서 위문왔을 때 『찾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무엇보다도 이안에서 천주님을 알고 죽게된 것만이 기쁘고 다행한 일로 생각합니다.』
그는 정말 어린아이와도 같은 기쁨에 가득차 있었다. 매주 금요일마다 윤형중 신부님이 오시면 언제나 그는 신부님 앞에서 정성스럽게 무릎을 꿇고 강복을 받았으며 여러차례 고해성사를 하고 교리담화도 진지하게 했다.
1965년 12월 22일 거리엔 진눈깨비가 내리고 즐거운 「징글벨」 소리와 함께 성탄절 준비로 붐빌무렵 그에겐 6차에 걸친 재심도 기각당한채 운명의 날이 박두하고 있었다.
10여차례의 진방을 거쳐 마지막 2사히22방에 잇으면서 그는 죽기전날 나에게 고명을 받게해갈라고 몇번 부탁하는 것을 신부님의 사정으로 다음주일 화요일로 미루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죽음을 목전에 두고 아무런 마음의 동요가 없었다는 것은 오로지 신앙의 힘이 그 내면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1966년 3월 30일 오전10시49분 드디어 때가왔다. 이런줄도 모르고 그는 그날 아침까지도 한쪽구석에 조용히 정화하여 열심히 묵주를 굴리다가 담당이 불러내자 이미 알아차리고 고개를 꺼덕이더란 것이다. 나는 교무과에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윤형중 신부님을 불렀으나 병환으로 입원중이라 부랴부랴 고행성사중인 서대문성당 김병기 신부님을 오시게 했다.
형장에서 묵주를 찾기에 갖다주니 비오듯 통회의 눈물을 흘리며 떨리는 음성으로 고명을 하더란 것이다.
『…살피시옵소서. 오 주여 이제 고히 내 영혼을 당신께 맡기나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날을 찾더란 것이다. 나는 그날 교무과 사무실을 비울 수가 없어 끝내 가보지 못했다. 몇시간 후 나는 그가 있던 감방엘 찾아가 보았다.
정성껏 표지를 싼 몇권의 책과 조각조각 기운 누더기 담요 위에 흰마스크 하나가 놓여있을 뿐이다. 그가 죽어도 시체조차 찾아갈 이 없다던 죽기전 그의 말이 생각났다. 허지만 그는 외롭지 않았다.
그는 진정한 참회의 눈물과 더불어 이세상 갖은 욕망과 갈등과의 악전고투 끝에 최후의 온전한 값을 치르고 이제 평화한 천국에 임했을 터이다. 봄은 다시 오는데 그는 이렇게 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