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傳敎實話(전교실화)] 길 잃은 양을 위해 (4) 「아베끄」살인 강도범 ①
발행일1966-08-21 [제531호, 2면]
역시 4년전 일이었다. 1962년 8월 10일.
「대전일보」 3면 기사엔 다음과 같은 사실이 크다랗게 보도되었다.
- 「아베끄」 남녀만 노려
대구 살인강도 진점으로
변태성 강도범 趙를 체포 -
이것이 바로 한때 세인(世人)을 놀라게 한 저 유명한 대구 「아베끄」 살인강도의 주인공 조일용(趙一龍 가명, 당시 28세)이다.
그는 야간을 통하여 경찰을 사칭, 주로 「아베끄」 중인 젊은 남녀만을 노려 무려 16회(신문기사엔 7회)에 걸친 범행으로 곤봉이나 몽둥이로 구차, 강도행위를 하고 또한 추행(醜行) 내지 강간행위를 한 변태적인 상습범이다.
그가 서대전 경찰서 경관에 의해 체포되기전까지는 대구와 대전을 전전, 일정한 주거 없이 사회를 배회하면서 갖은 행패를 다부리던 무시무시한 악질 깡패였다.
5830번, 조일용.
그가 6사상 18방으로 전방 오던 날은 1963년 10월 25일 낮이었다.
체격이 건장한데다가 귀는 쪼그라지고 주먹만한 코에 어찌나 그 인상이 험악하였던지 나는 명적계(名籍係)에 가서 신분장을 들쳐보기까지 했다.
고향이 경상남도 협천군 율곡면 융진리인 그는 16회나 걸친 범행결과 강도, 강도치사, 강도살인, 강도강간, 강도추행, 강도미수 등등 모든 흉악범을 나열한 것 같이 그의 죄명은 참으로 길고도 복잡했다.
나는 천주님께 기구를 했다.
<오 주여! 살피시옵소서. 저 불쌍한 형제로 하여금 자기의 죄를 씻고 마음문을 열어 천주님을 영접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실망한 것은 일자무식인데다가 쇠귀에 경읽기로 도대체 그는 마이동풍에다 동문서답이었다.
목석 같은 무지막지한 사나이.
이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도무지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용기를 잃지 않고 기 구를 하며 오직 천주님의 뜻에만 맡겼다.
그래서 무엇보다 우선 그에겐 한글을 가르쳐 주어야겠다는 생각부터 했다.
이러던 중 나는 인사이동에 의해 교무과로 오게 되었고 그는 4사하 14방으로 전방을 갓으나 미결수 서적관계로 계속 인연은 지속되었다.
마침 그때 같은 14방에 있던 박지원이란 사람이 그에게 한글을 가르쳐 줄 것을 자원했다. 그는 중앙교회에 나간다는 프로테스탄 신자였다.
『교파(敎派)는 서로 다르지만 우리 함께 하느님을 공경하는 것은 다 마찬가지이니까 이 사람에게 전교함을 위하여 한글을 좀 가르쳐 주십시요.』
나는 이렇게 부탁하였다.
<대개 너희가 구하기 전에 너희 성부 너희게 무엇이 요긴한지 알으심이니라.> (마테오 6 · 8)
이로부터 용기를 얻은 나는 즉시 교무과에 가서 한글교본을 갖다 주었고 그도 역시 밖에다 연락을 하여 필요한 책을 차입하여 열심히 한글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6 · 7개월이 지났을까, 무더운 어느 여름날.
나는 극형수(사형수)들에게 「가톨릭시보」를 나누어 주는 길에 천주교 요리문답을 가지고 가서 그에게 읽어 보라니까 제법 잘 읽지 않는가. 나는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이래서 그는 「가톨릭교리」와 「나는 왜 고통을 받아야 하나?」 「나는 믿는다」 등등 독서에 굉장한 발전을 가져왔고 그의 가슴엔 비로소 신앙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