全世界(전세계) 폴랜드人(인)들 「나치」에 犧牲(희생)된 콜베 神父(신부) 諡福(시복)운동
죽음의 收容所(수용소)서 餓死(아사)
10人(인) 家族(가족)을 代身(대신)해서
한땐 日本(일본)서 宣敎(선교)활동도 했고
【로마 NC】 망명의 길을 택하여 전세계에 퍼져있는 폴랜드 이주민들의 영적(靈的) 지도자 루빈 주교는 이주민들을 향하여 독일 「나치스」에 희생된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를 시성(諡聖)시키기 위한 운동에 적극 참여하라고 호소했다.
루빈 주교는 콜베 신부의 순교 25주년 기념일에 발표한 「메시지」를 통해 콜베 신부의 시복(諡福) 및 시성을 촉진 시키기 위한 개인적 단체적 기구와 콜베 신부의 일생에 대한 재조사 및 콜베 신부의 전구(傳求)를 요청하는 등 다섯가지 방법으로 시성촉진 운동을 전개하라고 요청했다.
콜베 신부는 1895년 1월 6일 폴랜드 「준카 볼라」에서 태어나 1919년 이태리 「파두아」에서 사제로 서품된 후 폴랜드로 돌아가 성모공경 운동을 처음으로 벌였으며, 1930년부터 1936년까지 일본에서 선교사로 일했다.
1939년 폴랜드로 귀국한 콜베 신부는 당시 폴랜드를 점령한 「나치스」군에 체포되었으며 그후 얼마동안 석방되었다가 1941년에 다시 체포, 「파비아크」에 구금된 후 「오쉬비쯔」 수용소로 옮겨졌다.
그러다가 수인(囚人) 한명이 탈출한 사건이 발생하자 10명을 굶겨죽여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때 콜베 신부는 희생돼야 할 10여명 중에 가족을 거느린 한 가장(家長)을 대신하여 죽겠다고 나서서 허락을 받았다.
그래서 그들 10명은 창문이 하나도 없는 감방 속에 갇혔다.
콜베 신부는 그 안에서 묵주신공과 그외 다른 기구들을 지도했다. 2주일이 지나자 6명은 죽고 콜베 신부와 다른 3명이 그때까지 살아있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페놀」주사를 맞고 끈질긴 보속의 길을 끝마쳤으니 그때가 1941년 8월 14일이었다.
콜베 신부의 시복운동은 1947년 5월 이태리 「파두아」에서 시작, 1952년에 그 조사결과가 「로마」 당국에 제출된 바 있다.
폴랜드의 수좌대주교 뷔진스키 추기경도 1963년 10월 교종 바오로 6세를 알현하고 콜베 신부의 시복문제를 논의했다.
한편 「로마」 당국은 1964년 1월 콜베 신부의 탓으로 돌릴 영적(靈蹟) 조사에 착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