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라파 겉 핥기 錄(록) (31) 잃어버린 모자
짐표 보일 필요 없이 찾을 수 있는 불란서
향수 달래준 빠리의 중국음식 숙주나물
발행일1966-08-21 [제531호, 3면]
또다시 「로마」로 들어선 나는 한달 남짓 묵으면서 늙은 「로마」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사실 일년 내내 있어도 골고루 구경을 다할 수 없는 곳이었다. (이태리 얘기는 그만 할까보다)
나는 불란서 「빠리」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모처럼의 「빠리」하늘을 빙빙 돌 기회를 가졌지만 불행히도 날씨가 흐려 하늘위에서 「빠리」를 감상할 수는 없었다. 외로운 나그네길이었지만 나는 곧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이 리노 신부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정말 반가운 얼굴이었다.
『신부님 안녕하십니까? 정말 반갑습니다.』
『이곳까지 오시느라고 수고가 많습니다. 연락을 받았지요』
『신부님 입국 수속을 마쳤는데 짐을 찾아야 겠는데요』
『아 그래요? 이리로 오세요』
나는 신부님이 인도해주는대로 끌려갔다. 짐을 찾으러 갔는데 별반 사람들이 없다. 나하고 같이 비행기를 타고 온 사람들도 그 방에 잠간 들렸다간 그냥 나가곤 한다.
『아니 누구한테 짐을 찾는거죠?』
『가만 있어봐요. 짐이 이 방에 저렇게 자꾸 들어오고 있으니까』
비행기에서 풀어논 손님들의 짐이 「에스카레타」에 실려 자동적으로 들어오고 있는 중이었다.
『저 짐 속에 태민씨 것은 없나요?』
『가만있자, 오! 저기 있군요』
『어떤거죠』
『바로 저겁니다.』
신부님은 재빨리 짐군한테 저 저 가방을 들고 가자고 말한다.
『신부님 짐표가 여기있는데 이건 누굴 주면 됩니까?』
『짐표요? 거 뭐 적당히 기념으로 갖고 계시지 그래요』
『아니 그럼 짐표도 안내주고 짐을 갖고가도 되는거야요?』
『제가끔 자기 짐을 찾아갖고 가면 되는 거죠』
나는 맘속으로 「서로 믿고 산다는 것은 얼마나 귀한 일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서울역에서 수화물 있는 곳에 가서 저기 있는 저 물건이 내 물건인데요… 하는 한마디로 짐표도 없이 물건을 내줄만한 시대가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엉뚱한 꿈도 꾸어보았다. 아니 기차 정거장은 고사하고 한국의 공항에서라도 이정도의 풍경이 있게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기도 했다. 얼마나 많은 도난사고가 생길까 하는 생각마저 들기도 했다.
손가락질 하나로 바로 찾은 내 짐은 한번 손대보지도 못하고 또 짐군에 의해 「리무진」버스에 실렸다.
「빠리」시내까지 가서 찾으라는 것이다. 난 버스에 타면서도 여러사람 짐과 함께 실려가는데 왜 짐표도 안주냐는 말을 할 용기가 없었다. 「빠리」시내에 들어선 난 버스에서 내렸다. 「에어 프랑스」회사의 사무실이 있는 곳이었다. 「빠리」주재 한국대사관의 노영찬씨가 마중을 나와있었다. 대뜸 중국음식의 접대를 받았다. 신부님이랑 노 선생이랑 같이 어울린 회식이었다.
서양 음식에 가까운 중국 음식이었지만 기름기 있는 서양요리에 진력이 난 나로선 눈물겨웁도록 반가운 성찬일 수 밖에 없었다. 두부며 숙주나무이며가 식탁에 나온다. 아침도 굶고 온터이라 불란서의 그 유명한 포도주 맛까지 봐가며 감개 깊에 잘 먹었다. 나는 우선 신부님의 호의로 이 신부님의 방안에 짐을 맡기고 함께 유숙하기로 했다.
저녁은 또 대사관의 기영주 참사관이 내겠다는 초청의 전갈이 왔다. 「빠리」에 도착하자마자 바쁜 「스케줄」이 생겨 한편 기분이 상승해질 무렵이었다. 문득 내 버리가 허전한 것을 느꼈다. 『아니 내가 쓰고 다니던 모자가 어디갔어?』
이태리의 명물, 둘둘 말아둬도 구기지 않는다는 「보 쎄리노」 중절모자를 확실히 쓰고 왔는데 온데간데 없이 없어졌다.
생각하니 중국집에 나두고 온 것이 틀림없었다.
『신부님 가만히 생각해보니 중국집에 들어갈때 쓰고 들어간 것이 생각나는데 나올때 그냥 나왔나봐요』
『아 그래요? 그럼 찾게 되겠죠』
『그럼 연락을 해봐주세요』
세계적인 명물이라는 이 모자를 일허버릴까봐 몹시 초조했다. 그냥 모자도 안쓰고 다니다가 짐속에 넣어둘 수가 없어 쓰고온 것이 잃어버리게 된 원인이었다.